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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무대 ‘메트’를 사로잡은 목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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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호 14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흔히 ‘메트(Met)’라 부른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가 전 세계 발레 스타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듯 이 시대 위대한 오페라 가수들은 모두 메트의 무대를 지향한다. 때문에 성악가뿐 아니라 지휘자, 작곡가, 연출가, 디자이너, 비주얼 아티스트, 안무가, 무용수, 오케스트라, 합창단의 질과 양에서 여타 메이저 오페라단과 비교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

15일 SFOV와 협연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홍혜란

메트는 시즌이 시작되는 9월께 앞으로 한 시즌 동안 오페라에 투입되는 주-조역, 커버(대기조)와 언더(배역 준비조)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게시한다. 이번 시즌에는 8명의 한국인 성악가가 이름을 올렸다. 소프라노 홍혜경·캐슬린 김·김지희·이윤아, 베이스바리톤 최정철, 바리톤 윤형·데이비드 원과 함께 홍혜란(33·소프라노)의 이름이 보인다. 쇼팽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음악 경연으로 손꼽히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011년 아시아 여성으로는 처음 우승한 그 홍혜란이다.

홍혜란이 대회 우승과 메트 입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 팬과 만난다. 15일 빈 슈트라우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SFOV)와의 협연을 통해서다. SFOV는 2011~2012년 소프라노 임선혜와의 공연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진 왈츠의 명수들이다. 홍혜란은 카를 젤러 작곡의 오페레타 ‘새 장수’ 중 ‘나는야 우편 배달부 크리스텔’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 등 4곡을 부른다. 고음에 장식음을 달아 좌중을 매료시키는 콜로라투라(Coloratura)의 특성과 ‘메트 선배’ 홍혜경의 귀족적 기품을 연상시키는 리릭(Lyric)의 자취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선곡이다.

홍혜란이 지금 메트에서 점한 위치는 대기조인 커버로 볼 수 있다. 1968년 당대의 수퍼스타 프랑코 코렐리가 공연을 취소하자 무명 테너 도밍고가 메트 무대에 올랐을 때 그의 역할도 커버였다. 나이나 경력으로 볼 때도 홍혜란은 아직까지 메트에서 막내 축이다. ‘팔스타프’에선 ‘난네타’의 커버를 맡아서 대기했고 슈트라우스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의 ‘제1시종’ 역은 메트가 시험적으로 던져준, 홍혜란의 기존 컬러와 상반되는 배역이다. 콜로라투라로 한정하기엔 따뜻한 저음이 있고, 리릭으로 보기엔 몸집이 작은, 중첩의 이미지를 스스로 뚫고 나오라는 지시로 받아들여진다.

홍혜란이 가진 매력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동영상을 통해 먼저 확인할 수 있다. 대회 기간이 길기로 소문난 이 대회에서 홍혜란은 1차 예선부터 모든 걸 보여주려는 경쟁자들과 달리 자신의 진가를 조금씩 꺼내는 전략을 택했다. 자칫 초반에 탈락할지 모르는 위험한 계획이었지만 심사위원들은 피아노에만 의지해 관객과 소통하는 2차 예선부터 홍혜란을 우승 후보로 꼽기 시작했다. 결선에서 황홀경에 빠져 노래의 바다를 유영하던 모습이나 우승자 발표에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오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흑진주’ 캐슬린 배틀이 카라얀과 1987년 빈 필 신년음악회에 출연한 이래 노래 잘하고 예쁜 용모에 체구까지 가녀린 소프라노는 더욱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 2011년 퀸에서 우승하고 그해 여름 잠깐 서울을 찾은 홍혜란을 예술의전당 커피숍에서 만난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어깨를 살짝 노출한 드레스가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메뉴를 살피고 차를 따르는 손길 하나하나가 정돈됐고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겸손한 목소리 톤이 이지적이었다.

공교롭게 국내의 명 소프라노 중엔 강원 출신이 많은데 홍혜경(홍천), 임선혜(철원)와 마찬가지로 홍혜란도 정선 태생이다. 대전에서 초·중·고를 거치면서 어렸을 때 목표가 ‘한국의 줄리아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1학년부터 오페라 전막을 배울 수 있는 학교 시스템이 좋았다는 시골 소녀의 추억은 벨기에 영화감독 티에리 로로의 다큐멘터리 ‘한국 클래식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music Korea)’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로는 홍혜란을 인터뷰하고 한예종을 방문하면서 콩쿠르를 석권하는 한국 클래식의 저력을 조명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홍혜란을 지켜본 바리톤 최현수는 “바로크 시대 예술가곡 분야에서 유명 지휘자들의 총애를 받으며 세계적 스타로 부상한 소프라노 엘리 아멜링을 이을 재목”으로 칭찬한 바 있다.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의미로 즐겁고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겠다는 홍혜란의 목소리에 기분 좋은 결기가 느껴진다. 메트 물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시켜줄 그녀의 한국 데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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