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밀수 뒤 3300억 가짜 계산서 발행 … 323억 세금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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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서울 종로 금은방을 상대로 소규모 유통업을 하던 정모(45)씨는 2012년 5월 무자료거래를 위한 업체를 차렸다. 금 몇 돈 팔아 푼돈을 남기느니 골드바를 유통해 큰돈을 벌 심산이었다. 정씨는 밀수상들로부터 시세보다 5~7% 싼 가격에 골드바를 사들여 다시 팔았다. ㎏당 5000만원을 웃돌았지만 많게는 하루에 10㎏도 판매했다.

 하지만 완제품인 골드바를 그대로 판매하는 것보다 직접 제조하면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금이 일부 함유된 합금인 금스크랩(금조각)을 모아 만든 것처럼 꾸미면 재료비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환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제련업체인 S금속과 손잡고 금조각을 판매하는 것처럼 가장한 유령회사를 만들었다. 종로 일대 노숙자들 명의로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한 뒤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인 6개월이 지나면 없애버리는 이른바 ‘폭탄업체’를 세운 것이다. 또 이 같은 불법거래가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폭탄업체와 무자료거래상 간에 이름뿐인 ‘간판업체’를 2~3개 만들어 바지사장을 뒀다. 세무조사에 대비해 실제 금조각을 거래하는 것처럼 계량증명서, 인터넷뱅킹 내역까지 위조했다.

 이렇게 발행된 허위 세금계산서는 무려 3300억원어치나 됐다. 소비자가 골드바를 구입한 대금과 부가세가 은행에 입금되면, 국세청은 부가세의 70%를 실시간으로 S금속에 환급해줬다. 부가세 예정 및 확정 내역을 신고하면 30%는 추후 환급됐다. 이들은 지난해 7월까지 14개월간 총 323억원 상당의 부가세를 부정 환급받았다.

 서울서부지검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허위세금조세포탈) 혐의로 관리책 정모(43)씨 등 11명을 구속기소했다고 8일 밝혔다. 주범 정씨는 일본으로 도주해 기소중지된 상태다. 또 S금속의 부가가치세 취소심판사건을 맡은 세무사 김모(39)씨 등 2명은 “조세심판원장에게 청탁하면 승소할 수 있다”며 대표 이모(50)씨로부터 4억원을 챙겼다. 전직 세무공무원 출신인 김씨는 변호사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검찰 관계자는 “금뿐 아니라 합금·폐동·고철 등 다양한 금속 매매 과정에서 허위 세금계산서가 발행됐다”며 “부가세는 매출세액에서 매입세액을 공제하는 방법으로 산출되기 때문에 재료비 등을 늘리는 만큼 더 많이 환급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의 경우 신삼길(56)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이 2007년 1조2000억원대의 골드바 변칙 무역을 통해 254억원의 부가세를 부정 환급받은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골드바를 수출용으로 거래하면 부가세가 면제되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후 매입자가 직접 정부 지정 금융기관에 부가세를 납부토록 제도를 개선했다. 하지만 다른 금속은 판매자와 매입자 간 직접 거래여서 부가세 환급이 훨씬 쉬웠다. 정부는 관련 범죄가 늘어나자 올해부터 금 외 다른 금속에 대해서도 매입자 납부제도를 시행한다.

 검찰은 이들이 부정 환급받은 부가세를 환수하기 위해 아파트와 은행예금 등에 대한 추징보전 명령을 법원에 청구했다.

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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