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화장실 찾는 한인에 친절 베푼 체코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프라하」에서 죄를 한번 지었다. 급한 생리 현상 때문이었다. 낯선 거리 한복판에서 쩔쩔매는데 아무리 두리번 거려봐야 그럴 듯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눈 딱 감고 아무데서나 『실례』할 처지도 못 된다. 할 수 없다. 근처 길거리에서 「소시지」를 사먹고 있던 젊은 「체코」 친구에게 다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W·C』하고 소리쳐 봤다. 「소시지」를 먹다말고 눈이 휘둥그래진 이 친구,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더니 너도 한 개 먹겠느냐는 그런 표정을 짓는다.
일은 급한데 엉뚱한 대답이 나오니 답답하기만 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오른 손을 배꼽 밑에 갖다 대고 『쉬이』 소리를 하면서 한국말로 「어디냐』고 물었다. 이럴 땐 한국말도 통하나 보다. 그는 「소시지」를 내뿜다시피 가가 대소 하더니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체코」말로 이리 꼬불, 저리 꼬불하고 설명을 하니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놈의 맥주는 왜 퍼 먹었노하고 후회할 겨를도 없다.
바로 이때다. 옆에서 이 촌극을 구경하던 반바지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기자의 팔을 덥썩 잡아끌다 시피 하여 길가에 세워둔 자동차에 타란다. 그리고 한 5분이 걸려 공중 변소에 데려다 주었을 땐 너무도 급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자동차 문을 박차다시피 뛰어나갔다.
『후유』. 황홀한 기분으로 일을 치른 다음 다시 한번 놀랐다. 나를 차에 태워주었던 그「반바지」씨가 빙글거리며 변소 앞에 서 있는게 아닌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폼이 나를 원래 태워 주었던 장소로 다시 데려다주겠다는 표정이다. 눈 딱 감고 다시 신세를 졌다.
이때까지 별로 죄 지은 건 없었다. 그런데 고맙다고 사례의 악수를 하면서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혹시 이자가 비밀 경찰이 아닌가 하는 생각. 모처럼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그런 생각을 가져야하다니 기가 막힌 얘기다.
철의 장막은 뚫릴 수도 있고, 또 뚫리고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장막을 어쩌랴.
그래서 「프라하」에서 예배당에 한번 더 갔다. <런던=박중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