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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위기와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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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시
(이만열)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유튜브에서 싸이의 ‘강남 스타일’ 동영상이 십억 번 이상 클릭된 것에 한국 사람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할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대단한 역동성과 창의성이다. 하지만 싸이의 최근 비디오 ‘젠틀맨’을 보고 나는 분명 한류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인 친구들은 싸이의 동영상이 강남의 물질주의 풍조에 대한 풍자라고 설명한다. 사실 싸이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으로서 그 동영상을 본 나의 솔직한 느낌은 소비문화에 대한 찬양과 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취급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절박한 이슈는 속도나 양이 아닌 방향성이다. 한국문화가 아무리 역동적이라도 분명한 윤리적 메시지를 담지 못한다면, 즉 한류를 즐기는 세계인들에게 단순한 수동적 소비를 넘어 무엇인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영감을 줄 수 없다면 종국적으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류의 융성에 기뻐하기 이전에 역사적으로 경제·문화대국들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비전이 없어서 아예 사라져 버린 문화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17세기 청나라를 이끈 만주족은 강력했다. 한족(漢族)마저 만주족 문화에 압도돼 변발 풍습까지 모방했다. 당시 만주족의 대중문화[滿流]와 행정 제도는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만주족의 문화는 어디에 있나? 17세기 중국인들은 필사적으로 만주어를 배우려 했으나 지금은 만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없다. 만주족 후예(後裔)들도 문화적 정체성을 잃은 채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만류(滿流)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유는 다양하지만 주된 원인은 그 문화가 철학과 문학, 그리고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뛰어난 통치 노하우도 그들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만류의 몰락을 한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작금의 한류에 대한 엄중한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신체적 장애우들이 케이팝 밴드(K-Pop bands)를 보면서 자신감과 영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거기서 매혹적인 외양보다 더 강력한 공헌, 믿음, 비전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여성들이 한국영화를 보면서 진정한 리더로 자라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패션과 외모만을 추종하게 되지 않을까? 해외 청소년들이 한국 대하드라마를 보면서 사회봉사나 평화와 환경에 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오히려 이기적인 환상이나 종속성만 키워지는 게 아닐까?

 한국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문화적 엘리트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세계적 강국이 된 유일한 국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은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에 그 어떤 나라도 줄 수 없는 영향을 줄 수 있다. 한류의 방향이 잘못된다면 전 세계가 그 비극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가령 한국 청소년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일회용 컵만 쓴다면 동남아·중앙아시아·중동 등지의 청소년들도 이를 모방할 것이다. 한류가 부모와 친구들을 배려하지 않고 개인의 이기적인 삶만 추구하는 풍조를 퍼날라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환경적·사회적 재난(災難)을 부채질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 문화는 어떠한가? 한국 어머니들이 쌀 한 톨이라도 아끼며 살았던 때가 진정 먼 옛날 이야기인가?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의 시대에 그런 절약의 미덕이 다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한류의 핵심이 될 순 없을까?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했던 옛 선비들의 친환경적인 삶이 더욱 강력하고 영감적인 한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순 없을까?

 우리는 상업화된 성과 소비문화를 넘어서야 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 공공의 이익과 환경,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소녀시대’를 떠올려 보자. 아프리카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한류에 영감을 받은 한 청년이 분연히 일어나 “나는 케냐의 세종대왕이다”고 외치는 날을 상상해 보자. 그런 장면이야말로 한국 문화에 내재하는 보편적 위대성을 상징한다. 비로소 그때에야 한류가 진정한 한류가 될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시(이만열)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약력 : 1964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출생, 예일대 학사, 도쿄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 조지워싱턴대 교수, 우송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