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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 원로들의 근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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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구영 씨>- 신경통 말끔히 나아 수덕사로 여행 떠나|초탈한 허무주의는 속세 미련 못 버린 탓·
청남 정구영(78)씨는 요즈음 자신의 건강에 흡족하다.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심한 신경통으로 거동도 못하다가 최근엔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건강이 회복되니 정신이 훨씬 상쾌해졌다고 했다.
13일엔 부인 홍영표 여사(66)과 수덕사로 여행까지 떠났다.
2, 3일 머무른 후 고향인 옥천에 들러 늦은 추석 성묘를 할 생각이다.
북아현동 마루터기 나지막한 한옥으로 그를 찾는 방문객은 드물다. 거의 평생을(66세까지) 몸 담아온 법조계의 노우들과 그의 강직과 소탈을 아끼는 몇몇 후배들.
『장자를 읽고 느낀 것이 초탈한 허무주의뿐이니 아직 속세에 대한 미련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신문을 정독하는 것도 그렇단다. 사설·정치·경제기사를 빼놓지 않는다.
신문이 보도되는 남북대화의 부진에 큰 실망을 느낀다고 했다.『단순한 가정에 불과하나 마지막 봉공으로 남북문제에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한다.『늙었기 때문만이 아닌 심경』이라는 전제를 붙여 그는 정치에 있어서 정적관념을 경계한다.『「정치적 낭만주의자」라는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런 사람인 모양』이라고 조용히 웃었다.
이번 가을엔「시몬·드·보봐르」의『늙음』을 일어 판으로 읽어보겠다고 한다.
서울 치대에 다니는 막내아들만 데리고 사니 집안이 조용하고 시력도 좋아 독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허정 씨>-매주 월·수·금의「골프」이외엔 두문불출|조석간 네 신문 다 읽고 방송뉴스도 안 빼
신교동 허정 씨 댁 근처의 주민들은 1주일에 세 번, 시간 맞추어 나가는 허씨의 새벽 외출을 본다.
얼마 전부터「골프」를 다시 시작해 매주 월·수·금요일 아침마다 한양「컨트리·클럽」으로 나가는 것이다. 거의 혼자 치며 간혹 부인 백귀난 여사(65)와 동행한다.
건강을 위해「골프」를 치러 나가는 일 이외는 일체 두문불출. 찾아오는 사람도 친척이나 특히 가까운 사람 외에는 거의 만나지 않고 있다.
우양 허정 씨는 77세의 나이를 의심할이만큼 정정하다.
『규칙적인 생활, 아무 욕심 없는 담담한 심경, 책임질 일없는 홀가분하고 조용한 여건으로 심신이 맑고 깨끗하니 건강이 좋은 것은 당연하지.』
그는 매일 아침 5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밤10시면 반드시 자리에 든다고 했다.
조석간 4개 신문을 빠짐없이 읽고「라디오」의「뉴스」는 시간마다 듣는다고. 우양은 『과거의 경험에서 앞으로도 우리 국운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무슨 계획이라도….
『아무런 욕심이 없으니 무슨 계획이 있겠나? 내가 한일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쓸 필요도 느끼지 않지.
그저 나라의 번영을 바랄 뿐이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여기면서 담담하고 조용하게 살아간다는 생각 뿐이야….』
자택뒤뜰「송풍정」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에서 요즘은 조용히 세상과 인생을 관조하고 있는 우양이다.

<윤보선 씨>-까치·참새소리 벗하며 정원손질로 소일|정치엔 함구 국가보조는 생활비에 보태
안국동 8번지, 선대부터 살아온 대궐 같은 자택에 묻혀 지내고 있는 해위 윤보선 씨(76)는 별로 찾는 사람이 없어 매일같이 정원을 손질하고 꽃에 물을 주면서 정원 숲을 날며 지저귀는 까치·참새소리 속에 지내고 있다.
5백 평쯤 되는 뜰에는 더러 꿩이며 왜가리도 날아든다고 한다. 외출이라고는 매주일마다 대문 맞은편에 있는 안동교회에서 예배보는 것과 한 달에 한번쯤 아산 선영의 산소를 찾는 정도.
집 주변에는 경기고·창덕여고 등 학교가 여덟 개나 둘러 있는데『학생들의 음악시간이 다소 시끄러우나 천진난만한 노래 소리가 때로는 생활의 낙』이라고 했다.
정치얘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스스로『하지 않겠다』는 말을 미리 다졌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관한 법」에 따라 정부가 매월 지급하는 22만2천원(현직 대통령 급료의 70%)을 생활비로 쓰고 있는 윤씨는 역시 정부보조로 3, 4대 의원을 지낸 조종호씨 등 3명의 비서를 두고있다.
혹시 목돈이 생기면 아산 선영에 산지기 겸 방을 들여 가끔 묵을 수 있는 별장으로 삼고싶다는 것이 윤씨의 소망.
윤씨 집 대문에는「윤상구」「윤동구」란 두 아들의 명패만 붙어 있는데 장남 상구씨는 얼마전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다시 들어갔으며 차남 동구씨는 육군에 복무중이다.
집 뜰에서도 단장을 짚기는 하나 윤씨는 건강한 편이며 최근에는 책읽기가 싫어졌고 신문은 제목만 읽는 정도라고 했다.

<박순천 씨>-탈당계 내고 여중재단 이사장 일에 전념|화곡동 자택서 손자·손녀 돌봐 주며 지내
지난 2월 신민당 중앙당에 조용히 탈당계를 낸 박순천 여사는 신민당과 아주 손을 끊고 정치하는 사람은 피하듯이 안 만나고 있다. 그래서 화곡동 산기슭의 자택엔 가을 햇살만 따스하다.
『모두가 시들하고 아무런 낙도 없다』면서『할말도 없고 듣고 싶은 말도 없다』는 박순천 여사(75)의 노안은 2∼3년 사이 주름살이 훨씬 는 것 같다.
지난 7l년1월 근명 여중교의 재단 이사장에 추대되어 주중 월·수·금 사흘은 안양에 있는 학교에 나가 일을 보고 일요일은 제2한강교 부근 양화진 성당에 나가 예배를, 그리고 나머지 요일은 집에서 손자·손녀들을 돌봐주며 소일하고 있다. 여생은『학교 일에나 전념해 알뜰한 주부들을 키우는데 노력하겠다』는 것.
틈틈이 읽고 있는 책은「정계야화」.
『특히 해공 선생 돌아가시는 장면은 눈을 적시며 읽었다』고 했다. 지난날 정치이면사를 읽으면 새삼스럽게 해공과 유석이 참 애국자였음을 거듭 느꼈다고 했다.
잠시도 무료히 지내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틈만 나면 화초 가꾸기, 집안청소를 했는데 5일전 집수리 작업을 돕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나도 빨리 가야할 사람이지만 가슴에 꽉 맺힌 것이 있어 그것을 청산해야겠는데!』라며 말끝을 맺지 않았다.

<유진오씨>-야당 당수 인상가시고 선비풍 되찾아|정치인 안 만나고「양호기」속편 쓸 계획
한복을 입고 손수 차를 끊이며 책과 벗하는 현민 유진오씨(67)는 한때 야당 당수였던 인상이 가시고 학자출신다운 선비 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씨는 얼마 전부터 눈이 나빠져 글읽기가 힘겹다고 했다.
안경을 써도 몇「페이지」읽자면 눈이 아파 요즘 읽고있는「장·프랑솨·아브벨」작의 영어판『마르크스와 그리스도 없이』란 책을 좀처럼 독파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하던 막판에 얻었던 신병 탓인지 요즘도 다소 다리가 후들거려 현민은 산보를 거르는 날이 거의 없다.『한때 남산을 즐겨 걸었으나 요즘엔 자연미가 없어졌고 산허리에 난 도로에 인도구분이 없어 그곳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엔 비원과 어린이 대공원, 한강의 남쪽기슭을 자주 걷는다고.
유씨가 신민당을 떠난 지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정치인들은 아무도 그의 주변에 없다.
그가 속해있는 학술원의 학자, 홍종인 씨 등 원로 언론인들과 더러 만나 세상얘기를 나눌 뿐이다.
전씨는 지난5월 미국엘 다녀왔다.
『미국의「섹스」현상은 일종의 정신병이며 현대의 가장 골칫거리인 것을 느꼈다』고 했다.
더러 유성별장에서 지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별장에 가 있는 동안「10·17」계엄령이며 김대중 씨 사건 등이 일어나서 최근엔 별장에 내려가는 것이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교우신문에 연재했던「양호기」의 속편으로 해방후의 고대관계 글을 앞으로 쓸 계획이며 고전과 현대의 사상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생각이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필동집을 내놓고 있으나 임자가 나서지 않는다고. <연령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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