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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 부조리 파헤치며 카타르시스 선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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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호 11면

영화 ‘변호인’은 4일 오전 누적 관객 700만 명을 돌파했다. 개봉 3일 만에 100만, 1주일 만에 300만, 12일 만에 500만을 넘는 역대 최고 흥행 속도다. [중앙포토]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요즘 실화 바탕으로 한 영화 인기, 왜?

영화 ‘변호인’은 이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초 부산을 배경으로 가방 끈 짧고 ‘빽’ 없는 세무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이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송우석이 변호를 맡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제 5공화국 초기의 ‘부림사건’이다. 실제 사건에서 변호를 맡았던 이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극중 송우석 변호사는 변호사 시절의 노 전 대통령인 셈이다. 실화와 실제 인물이 주요 모티브가 된 ‘변호인’은 누적 관객 700만 명(4일 오전 기준)을 돌파하며 1000만 관객 기록을 향해 가고 있다. 영화는 소재 덕에 주목을 받았지만 잡음도 컸다. 정치성 논란과 함께 상영 직전 영화표를 대량 취소하는 ‘티켓테러’, 의도적으로 낮은 평가 점수를 매기는 ‘별점테러’가 발생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달 11일 개봉한 ‘집으로 가는 길’도 실화를 다룬다. 2004년의 ‘장미정 사건’이다. 마약을 운반하다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체포됐던 장미정씨는 2년간 카리브해의 외딴 섬 마르티니크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국민 보호에 무책임한 외교부를 질타하는 영화는 ‘대한민국이 외면한 실화가 공개된다!’고 포스터에 적었다. 외교부 관계자들은 “영화에 나온 게 사실만은 아니다”라지만 관객들은 ‘외교부가 국민을 울렸다’고 영화를 읽고 있다.

허구가 개입했다는 사전 안내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스크린과 현실의 창을 겹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부림사건 다룬 ‘변호인’ … 700만 관람
‘팩션(faction: fiction+fact)’이라고 하는 이런 영화들은 실제 사건에 허구를 가미한다.

다음달 6일 개봉하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사진 위), 용산사건을 다룬 39소수의견39도 곧 개봉한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역대 흥행순위 100위에 포함된 영화 중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 영화는 7편이다. ‘국가대표’(2009·803만 명), ‘변호인’(2013·700만 명), ‘화려한 휴가’(2007·685만 명), ‘도가니’(2011·466만 명), ‘말아톤’(2005·419만 명),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400만 명), ‘부러진 화살’(2012·345만 명)이다. 2004년 이후의 기록만 집계했기 때문에 525만 명을 동원한 ‘살인의 추억’은 여기 포함되지 않았다. 순위엔 없지만 ‘이형호군 유괴살인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2007), ‘조두순 사건’을 다룬 ‘소원’(2013)도 300만 명에 가까운 흥행 성적을 올렸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와 현실 사이에 끈이 생기면서 몰입하기 쉽다”고 흥행 이유를 풀이했다.

영화가 실화를 다루는 방법은 다양하다. ‘말아톤’이나 ‘국가대표’처럼 감동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살인의 추억’처럼 범죄 사건을 다루는 스릴러가 되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걸 보여주는 팩트의 힘이 있다. 개연성을 보장해 주니까 흥미도 커진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변호인’이나 ‘집으로 가는 길’ 등은 스릴러나 감동 드라마와는 다르다. 단지 한 개인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국가·사회 안에서 개인이 겪은 이야기를 다룬다는 차이다. 강성률 광운대 교수는 이를 “공권력과 행정이 부재한 상황을 그려내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씨의 말도 다르지 않다. “영화가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면서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대중들은 저널리즘이 말해주지 않은 걸 영화가 대신해 준다고 생각한다. ‘도가니’가 그랬고, ‘부러진 화살’도 언론 보도만으론 명명백백한 진실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여겨졌다”고 했다.

영화가 답을 주거나 미스터리를 풀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영화에 빠져드는 데 대해 김영진씨는 이렇게 말한다.

“팍팍한 현실에서 우리는 늘 패배하는 것 같은데, 영화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악을 응징하는 쾌감을 주고, 설령 ‘변호인’처럼 패배하는 설정이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강유정씨도 “지금 관객은 감동이나 인간승리 같은 달콤한 현실에 대한 판타지를 원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영화를 통해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길 원한다”고 실화영화의 인기 요인을 설명했다.

지나친 몰입으로 실제 사건 왜곡하기도
감춰진 진실에 대한 호기심은 흥행으로 연결됐고, 카타르시스는 반향을 불러왔다. 관객 스스로가 영화 관람을 일종의 사회운동 참여로 받아들이면서 관람평도 호불호(好不好)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덕현씨는 “영화 ‘도가니’ 이후 실제로 재수사가 이뤄졌고 학교가 폐쇄됐다. 제목을 딴 일명 ‘도가니법’도 제정됐다.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본 사람들이 SNS를 통해 모이고 현실을 움직이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조원희씨는 “예전에도 실화를 가지고 기획한 영화는 있었다”고 했다. 그가 예로 든 건 1990년 개봉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다. 강제추행을 당한 여성이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지만 오히려 폭행 혐의로 실형을 받은 사건을 다뤘다. 항소심에서 정당방위를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법정극으로 보여준, 전형적으로 사회성 짙은 영화였다. 조 감독은 “다만 이제야 사회가 이런 영화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라며 “영화적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보고 공감한 관객들이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했다.

하지만 관객이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영화가 팩트와 픽션 사이에 있다는 걸 잊고 영화 속에서 규정되는 선과 악의 구도를 현실로 끌고 오기도 한다. 정덕현씨는 “‘부러진 화살’도 논란이 많았다. 다른 쪽은 매도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변호인’의 경우도 ‘부림사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속물이었던 한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변호인’의 제작사 측도 “논란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고 했다. 위더스필름의 최재원 대표는 “(이런 소재를 다루는 데 대해) 부담감은 있었다”면서도 “정치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면 대선 전에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변호인’의 시나리오를 받은 게 2012년 5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차용한 부분은 있지만 주요 등장인물은 가공이고 법정 내용도 완전히 다르다. 허구를 만들었는데 해석하는 과정에서 감정이입이 많이 이뤄졌다. 영화를 받아들이는 건 어차피 관객의 몫이다.”

사회적 이슈를 다룬 실화 영화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영화산업이 만들어 낸 트렌드는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도 이른바 주류가 만든 영화가 아니었고 투자를 받기도 어려웠다. 영화를 만든 건 제작자와 감독의 의지였다는 얘기다.

곧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 편이 개봉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씨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과 용산사건을 소재로 한 ‘소수의견’이다. 제작비 약 10억원이 든 ‘또 하나의 약속’은 ‘두레 제작’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집했다. 제작위원회 측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소재에 투자자를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영화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7000여 명으로부터 5억원을 투자받는 등 개인 투자자들을 통해 제작비 대부분을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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