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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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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승엽의 독주>
서울 등지에서의 김일성의 포악하고 추잡스런 약탈행위는 말이나 글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6·25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는 당시를 되새길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의 그러한 만행을, 자기 개인의 입신출세를 위해 충실히 집행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남노당의 월북파를 대표한 이승엽이었다.
이 일당의 힁포는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일반 사람은 물론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 수사기관에 쫓기면서도 당에 협력을 하여주던 사람들까지 이승엽 일당에 집을 빼앗겼다고 나에게 호소해 오곤 해 몰수한 기관의 대표를 만나 그러지 말도록 부탁했으나 그들은「국가사업」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이승엽 일족은 남한의 생사 여탈권을 쥔 이른바 「전권위원」이라 하여 마치 말로만 듣던 화적과 같은 짓을 하고 다녔다. 그중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이승엽의 장모라는 극성스런 여자다.
이의 장인인 안기성은 경북 안동사람으로 만주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귀국, 48년 월북하여 혁명가 유가족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동란 때 다시 서울에 와서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안의 부인이란 여자는 함경도 출생으로서 안기성과·재혼할 때 절름발이 딸을 데리고 왔었다. 이승엽이 형무소에서 전향하여 나와서 장가도 못 들고 구차하게 살 때 다 같은 공산주의 동지인 안기성이 자기의 재취처가 데리고 온 딸 절름발이를 이승엽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그런 것이 세상이 우습게 돌아가서 이승엽이 뜻밖에 동란 시에 남한의 총독같이 되었으니 그의 장모라는 것이 따라서 기고만장하였다.
한강을 넘어서 남쪽으로 피난간 고관재벌들의 집을 모조리 털고 다녔다. 명목은 「이승엽 선생의 이불을 구한다」며 장롱 밑을 털어 금은보석 등과 좋은 기물들을 모조리 훔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소문을 들을 때 이승엽이가 남로당을 다 망쳐놓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실정을 박헌영에게 전하여 이승엽의 모가지를 떼나하고 노심초사하였던 것이었다.
이승엽은 김삼룡과 가까운 간부들은 모조리 떼어버리고 자기 직계의 간부로써 진영을 완전히 짜서 남로당을 자기파 일색으로 만들려하였다.
이승엽은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서울시 인민위원회에는 그의 친우인 조두원을 계획부장으로 하고 「노력인민」에 있던 변귀현을 상공부장으로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출신지인 경기도 인민위원장에는 자기의 직계인 안영달 (뒤에 안영달 후임으로 박승원이 됨)을, 동부위 부장에는 자기의 장인인 안기성, 그리고 또 하나의 부위원장 자리에는 인천 동향 관계자인 김점권을 배치하고 해방일보 주필에는 옛날 조선일보 기자 시대의 후배이며 북한에서 같이 있던 이원조를 배치하였었다(처음 주필이던 노동신문의 장하일은 일찍이 평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
그러나 서울시당 위원장 김응빈과 경기도당 위원장 박광희 만은 해방 전 서울 「콤클럽」 출신으로 박헌영 직계였다. 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승엽계의 간부라는 것은 전원이 다 일제 때 전향한 사람이며 성분이 복잡한 사람들인 것이 특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김일성이 이승엽을 죽일 필요가 생겼을 때 「미제의 간첩」이라는 트집을 잡기 쉬웠던 것이었다.
이승엽은 처음 자기직계인 안영달을 시켜 「블랙·챔버」(비밀기관)인 「토지조사회」라는 기관을 조직케 했었다.
이 기관은 간판인 토지조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소위 「반동분자 수색 체포기관」이었다. 자수해온 한국관리를 밀고시켜 그의 관계자를 체포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하여 사람들을 체포하고 이용하고 있었다.
이 기관은 이승엽과 안영달 일당이 짜 가지고 그들의 비행을 아는 사람이면 같은 당원이라도 비밀리에 처치하는 악행도 저질렀다 한다.
김일성은 서울에서 정치보위부를 시켜서 이러한 악행을 하였고 이승엽은 안영달의 토지조사회를 시켜서 악행을 하였었다.
7월 초순에 노동당 부위원장 허가이가 밤중에(그때는 미군의 폭격 때문에 평양과 서울간의 자동차 연락은 밤중밖에 되지 않았다)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점령지역을 시찰하고 돌아갔었다.
나는 허가이 부위원장이 서울을 다녀간 후에는 반드시 박태영 부위원장이 서울의 실정을 시찰하러 올 줄 믿었었다. 박태영이 서울에 오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직접 만나서 직소하려고 결심하였었다.
그래서 이승엽 일당의 비위는 물론 그릇된 정책 등을 낱낱이 적어 노동당은 서울시와 남한지구에서 그 뿌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승엽을 즉시 파면하면 그 책임의 소재를 서울시민 앞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적었었다. 이러한 보고서를 나 혼자 비밀리에 작성해놓고 박헌영이 서울로 오기만 기다렸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박헌영은 영영 서울에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7월 중순 어느 날 밤중에 T자의 견장을 달고 하사관의 군복을 입은 김일성이 뜻밖에 서울에 나타났었다. 그는 미행으로서 점령지구를 시찰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로당세력과 박헌영이 서울서 직접 손을 잡을까 두려워서 끝끝내 박헌영을 평양 안에 잡아놓고 한번도 서울에는 보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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