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이렇게 본다|제155호 신라 고분서 나온 천마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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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55호 고분에서 나온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와 마구들에 관련해서 문화사적·미술사적으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일부에선 이들 자료들을 일본의 강상 교수의 「기마 민족설」과 연결 지어 설명하고 있으며 한국 회화사의 획기적 성과로도 설명한다. 고분 축조년대를 아는데도 훌륭한 자료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음은 전문학자들의 견해다.
▲김원룡 박사(서울대 문리대·고고학)=신라의 문화는 여러 교류 문화의 산물로 보인다. 삼국간의 교류는 물론 북방의 기마 민족적인 기질이 퍽 강하게 전해진 것 같다.
말의 반달무늬가 흑해 지역에 거점을 두었던 북방 「스키타이」미술의 감옥 장치 전통인 것은 북방의 영향을 잘 말해 준다.
그러나 155호분의 천마도와 마패들을 가지고 북방의 기마 민족이 남하했다고 하는 설을 새삼스레 설명한다는 것은 어색하다. 신라의 고분들에선 이미 많은 마구가 나왔으며 울주화랑 유적지의 「기마행렬도」나 기마형 토기 등이 이미 신라 사람들의 승마 관습을 설명한 바 있다.
일본의 「에가미」교수가 설명한 이른바 「기마민족설」은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와 지배계급이 됐다는 것인데 이를 이번에 나온 마패와 천마도를 바탕으로 굳힌다고 볼 수도 있다.
백제를 통해서 북방 민족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미 이기백 교수가 영천 지구에서 일정때 말로 된 말을 새긴 마패의 예를 설명, 신라 지역에서의 기마민족의 출현을 얘기한 바도 있다.
천마도는 벽화 이외의 그림으로서는 가장 오랜 것이고 유일한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랜 회화였던 고려 충렬왕 32년(1304년)에 그려진 불화 「아미타상」과 다음 해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금칠석가병」에 비해 8백년 가량 앞선 것으로서 학술사적 가치가 더욱 큰 것이다.
인동문이 고대 「이집트」·「페르샤」·중국을 거쳐 4세기경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나 무늬의 모양에 따라 4기로 구별하며 이번 천마도의 인동문은 5세기 또는 6세기초의 것이기 때문에 고분의 연대도 그 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훈 박사(학술원 회장·국사)=고구려의 벽화가 있으나 나무껍질·직물 그림은 처음이니까 대단히 귀중하다.
인동문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이 크며 생동하는 그림은 신라인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이나 마구를 보고 「기마 민족설」과 연결 짓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 나라의 기마 풍속은 이미 고조선과 위만조선 때부터라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등 문헌에 나와 있는데 새삼스레 가설에 불과한 일본 학자의 설명을 여기에 부언할 필요는 없다.
위씨조선의 석거가 한무제와 싸우면서 가진 강화 담판 때도 『5천 필의 말을 조선이 한에 보내기로 했다』는 『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을 전부 믿지 않더라도 당시의 말의 사용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의 사용은 물론 문화의 발달 속도에 관련해 북부보다 남부에선 느리지만 삼한의 말 사용 기사도 『삼국지위지』에서 볼 수 있다.
『마한에선 우마의 승용을 모르고 부장하는 풍속이 있다』고 하는 기록은 주로 운반용 노동력으로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잘못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장하기 위해 우마를 기른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 기록에 같은 시대의 『변진에서는 우마를 승용할 줄 알았다』고 한 것만 봐도 넉넉히 알 수 있다. 신라의 고분들에서 마구가 많이 출토된 것은 당시 말의 사용이 많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귀인들이 특히 승용으로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의 축조 연대는 그림의 인동문으로 봐서 4, 5세기께로 추측되며 법흥왕 이후의 2, 3대 이내의 왕릉이 아닌가 보인다.
▲이기백 교수(서강대·국사)=이 천마도나 마구를 가지고 고분의 연대는 모르겠다. 신라에는 이미 마구가 많이 출토돼 있는 만큼 새삼스레 강상의 「기마 민족설」을 확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구의 장식 등 전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중국의 출토예 등과 비교연구 될 귀중한 자료다.
▲이용범 교수(동국대·만주사)=기원전 시대에 사용하던 말 재갈이 낙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일이 있고 말에 관련한 암각화들이 이미 있었다.
천마도를 가지고 북방 민족설 또는 기마 민족설을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초숙(말먹이)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나타나며 따라서 삼국인의 기마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적 사실을 가지고 민족 기원에 연관 짓는 것은 혼동이 아닐 수 없다. 천마도는 미술사적으로 화법이 문제되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와의 비교 등이 기대될 뿐이다.
▲서정범 교수(경희대·민속학)=천마도의 백마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와 연관을 갖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연정 곁에서 「흰말」이 꿇어 있고 그곳에 알이 있었는데 흰말은 하늘로 올라갔다. 알을 깨니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얘기다. 여기서「흰말」은 천사로, 천마도의 「흰말」도 바로 천사로 볼 수 있다. 왕의 영혼을 상계로 올라가게 하는 천사인 것이다.
또 「시베리아」「바이칼」지역의 「브리아드」족의 「샤먼」들이 가진 마두·마제형의 지팡이는 정령을 향해 갈 때의 신속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장품의 마구나 백마는 사후의 영혼이 타계에 갈 때 타고 다니는 구실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시베리아」 「야구드」인의 「샤먼」의 조상이 자작나무와 관련을 가진 것을 보면 백화수피에 그린 그림은 더욱 고대 신라의 북방계 문화의 특질을 암시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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