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이한옥 여사|경기도 화성군「어머니 간장공장」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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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를 보고「도우며 사는 여성」이라구요? 일생 동안 농촌운동을 한답시고 가족들을 못 살게 굴고, 이제는 간장공장을 차려 수많은 조합원들에게 물심 양면으로 피해만 주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이한옥 여사(60)는 많이 늙고 지쳤으나 여전히 뛰고 있다. 화성군 치안면의「어머니 간장공장」구내에 방 한 칸을 마련해서 살고있는 그는 농협으로 군청으로 군 보건소로 무더위 속을 부지런히 뛰고 있다. 이 공장을 궤도에 올려놓지 않고는『죽을 수도 살수도 없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23살 때 일본 암수현 원원의 농업경영전수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와 40여 년을 농촌운동에 종사해 왔던 이 여사는 70년10월 1백 여명의 주부들을 주주로「어머니 간장공장」을 설립했었다. 농촌의 주주들은 메주를 쑤어대고 도시의 주주들은 이 된장 간장을 사들임으로써 농가부업육성과 식생활개선 그리고 부정식품 방어전선을 동시에 펴려고 했던 이 공장은 이 여사가 오래 꿈꾸어온 농촌운동의 한 이상형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장독대를 없애는 대신 어머니들 자신이 만든 이 「안전식품」은 더 많이 팔릴 것이고 이렇게되면 농촌주부들은 메주 쑤는 일만으로도 재미를 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운영하는 공장』의 성공을 확신했던 이들 주주들은 이익금의 반은 농촌교육을 위한 기금으로 따로 모을 계획까지 세웠었다.
그러나 5백만원을 들여 6l평 규모로 시작했던 공장은 그후 건평을 1백20평으로 늘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단 공장으로 문을 연 이상 보건소의 시설 기준령을 지켜야했기 때문이다. 발효실·실험실·저장「탱크」등 각종시설을 기준에 맞게 고치기 위해 공장은 계속 빚을 졌고 생산은 지연되었다.
『우리가 생각을 돌려 이 공장을 재력 있는 개인에게 넘겨주었다면 일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농촌사업의「모델· 케이스」라는 것을 명심했고 끝까지 공공사업으로 발전시켜가야 된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만원·5만원, 혹은 50만원까지의 기금을 투자했던 조합원들 중에는 물론 공장의 성공에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돈 있는 몇몇 사람들은 공장이 빚에 허덕이자 아주 사들이려고 나서기도 했다.
밖에서도 공장을 사겠다는 많은 유혹이 있었다. 소비조합조직을 가지고 있는 이 공장이 앞으로는 유리하리라는 것을 모두 내다봤기 때문이다. 이 이 여사의 고집과 이 여사를 믿어주는 많은 조합원들의 힘으로 공장은 수많은 난관을 넘어 섰다.
농협직매장을 통해 「어머니 간장」을 납품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중이고 이 간장은 우선 수원근교를 중심으로 착실히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로부터 제1회「용신봉사상」을 받기도 했던 이 여사는『생산조직과 소비조직을 한데 묶는 생활협동조합이야말로 농촌과 도시의 격차를 해결하는 지름길』 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20여년 전 생활협동조합법이 제정된 이래 전국에 걸쳐 방대한 조직이 운영되고 있는 일본의 예를 들면서 이 여사는 「식초공장」「아동복공장」등으로 많은 생활필수품의 생산과소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3년 전 별세한 김천수 교수(서울대 농대)와의 사이에 봉영·우영·은영·화영·숙영 등 다섯 딸을 둔 이 여사는 영남대교수인 맏사위 강신표 박사가『농촌운동을 돕는 동지』였다고 말한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시골을 찾아다니며 야학도 열고 생활개선도 부르짖고 농협 부녀 부에서 일도 했던 이 여사는 간장공장이전인 64년 수원시 율전동에 두부 공장을 세워 생활협동조합을 성공시키기도 했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너무도 많았다』는 오랜 농촌운동을 회상하면서 이 여사는 『농촌 출신의 「리더」가 곳곳에서 나와야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수원에서 장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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