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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에 익숙해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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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윤창희
윤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밴드’라는 SNS 서비스가 지난가을 무렵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10여년 전 동창회 열풍을 이끌었던 ‘아이러브스쿨’의 모바일 버전이다. 얼마 전 고교 친구의 권유로 가입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오래 들어가게 된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된 동창들의 대화창엔 1980년대 추억이 넘친다. 빛바랜 사진과 함께 나누는 대화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모바일 세상에서 밴드가 있다면 방송에선 ‘응답하라’ 시리즈가 향수를 자극한다. ‘응답하라’가 겨냥한 90년대는 40대 중반에겐 20대 청춘의 기억이다.

 80∼90년대에 대한 이 뜨거운 관심은 도대체 뭔가. 많은 한국인들을 몰입하게 하는 구심력의 정체 말이다. 복고풍 패션처럼 잠깐 유행했다 사라지는 바람일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옛 대학 시절의 감성, 첫사랑의 기억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뜨겁다. 전문적인 사회분석가는 아니지만 이런 추론을 해봤다. 고도성장 시대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같은 집단의식이 그 시절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지. 그땐 분명 기회도 더 많았다. 물가도 뛰었지만, 월급은 더 빨리 올랐다. 월급만 알뜰히 모아 모아 집을 사면, 몇 년 새 2∼3배로 뛰기도 했다. 대박 기회도 많았다. 지방이나 서울의 변두리 고교를 다녀도 2~3년 바짝 공부하면 SKY대학 입학이 가능했다. 삼성 같은 대기업 들어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30대 사장도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대기업 들어가려면 수백 대 1 경쟁을 뚫어야 한다. 30대 사장은커녕 미래만 생각하면 직장인들의 한숨은 커진다. 대박은 고사하고, 가진 돈 지키기도 쉽지 않다. 전셋값과 교육비에 등골이 휜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느끼는 이 무력감과 아쉬움은 또 뭔가. 그때보다 지금 형편이 훨씬 나아졌는데 말이다. 그 차이가 고성장 시대와 저성장 시대의 간극이라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8% 이상 성장하던 국가에 올라타 느끼던 짜릿한 속도감이 절반 이하로 감속된 상황에서 느끼는 나른한 무력감 말이다. 기회는 줄고, 젊은 층은 힘을 잃고 있다.

 성장률을 그때만큼 끌어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당연하다. 그런데 현실적이진 않다. 그 어떤 지도자가 나와도 747(7%대 경제성장)의 축복은 불가능하다. 우리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일을 소홀히 해선 안 되겠지만 저성장 시대라는 대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신 새 패러다임에 맞는 눈높이, 생활방식, 경제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일궈놓은 결과물인 지금의 현실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경제와 사회를 조금씩 업그레이드해 나갈 방안을 찾는 게 현명하다. 입에 달고 다니는 불황 타령, 안줏거리는 되겠지만 크게 좋아지긴 어렵다.

 새해는 긍정적으로 시작해보자. impossible(불가능)에 점 하나 찍어 i’m possible(가능)이 되고, nowhere(어디에도 없다)에 스페이스바 눌러 now here(여기에 있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