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속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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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은 화단에도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은 아침이다. 햇살이 뿌옇게 퍼진다. 오늘도 굉장히 무더운 날이 예상된다.
『소나기라도 한 줄기 퍼부었으면….』
며칠째 같은 소리로 염원하시는 아버지는 삽을 챙겨 논에 물을 대러 나가신다. 가볍게 걷는 발짝에도 먼지가 뽀얗게 인다.
채전 밭에 파·고추 모종이 성장은커녕 한낮이면 기진맥진이다. 그렇게 긴 가뭄은 아니었는데, 이슬 한 방울 머금지 못한 밤과 한낮의 뜨거운 폭염에는 맥을 못 추는 모양이다.
그래도 가깝게 있는 오이나 가지 밭에는 저녁때마다 조금씩 물을 뿌려 주었더니 열매가 제법 잇달아 굵어지는데 오이는 세 개중에 한 개는 틀림없이 그 맛이 씁쓰레하다.
그래서 서둘러 마련한 식탁에서는 집안 식구의 표정마저 씁쓸한 오이 냉채로 번해 난 괜히 민망스럽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정성을 기울여 물을 주어도 푸짐히 내리는 빗방울만 못한 모양이다.
이대로 며칠만 더 가물었다가는, 하는 삭막한 생각이 덮쳐오고…실오리 같은 여유로 신문을 펼쳐본다. 교과서를 넘기던 버릇대로 8면부터 큰 활자를 더듬어 본다.
평년기온보다 3∼4도가 높다는 각 지방의 최고기온이 더위를 더하고 낭만이 담긴 「레저·가이드」를 호기심으로 읽고, 그런데 치오르는 물가상승에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물가의 저자세는 뜨거운 폭염과 갈증나는 가뭄보다 한발 더 가까이 현실 앞에 다가선다.
『얘야, 사분 아껴쓰래이.』시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의 첫 말씀이 비누 값이 너무 올라 빨래도 재대로 못 빨아 입겠다고 걱정이 대단하시다.
상추랑 몇 가지 소채를 무겁게 이고 가셔서 팔아 장만한 비누·조미료가 오늘따라 장바구니에 뎅그렇게 작아 보인다. 노력하는 만큼의 대가가 주어진다는 세상이라 지만 우리의 농촌에서는 아직 생소한 낱말 같다.
오늘 저녁때에는 좀 힘이 들더라도 고추밭에 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좀더 나은 수확에 기대가 크다. 심미숙<경남 울산시 야음동100 심태구씨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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