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79) 중립지대안의 수용소(4)|인도군의 포로관리(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공산측이 인도군에 인계한 송환 거부 「유엔」군 출신 친공포로는 한국군 3백35명, 미군 33명, 영군 1명의 도합 3백69명으로 귀환 불원 반공포로의 60분의 1도 안 되는 적은 숫자였다.
군사분계선 북방에 수용된 이들 친공포로들은 공산당의 학습과 선전에 의해 붉게 물들어 설득전장의 제물로 끌려 나왔을 뿐 패기와 신념에 차있는 남쪽의 자유로운 반공포로들과는 달리 터무니없는 공산 지령과 선전을 앵무새처럼 외워대며 상호 감시와 공포에 떠는 장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부부포로 필사의 탈출>
공산군은 세뇌로 적화시킨 포로들에게 행정협력위원회라는 3인조 감시의 철저한 공산조직의 고삐를 씌워 놓았지만 이들 친공포로들 중에도 자유에의 이탈자는 있었다.
적색 수용소 안의 2명의 한국군출신 친공포로가 귀환설득을 받기 전인 10월 하순에 이같은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다.
친공포로들은 중립지대에 수용되기 전 개성 등지에서 철저한 공산 학습을 받았고 갖은 방법의 비밀 감시를 당하던 중 이같은 극적인 탈출사고가 발생하자 3∼4명씩 철사줄로 발목을 묶어 잠을 재우는 등 감시를 더 엄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득이 족쇄를 채우지 않은 2명의 아기를 가진 한국군 출신 부부포로가 또다시 필사의 탈출에 성공하여 공산군측을 몹시 당황케 했다.
「유엔」측은 이같이 설득을 전개하기에 앞서 미군 한 명을 도합해서 7명의 친공포로가 「탈출」해와 일대 개가를 올렸고 적측 수용소의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가 있었다.
그러면 당시 중립지대 친공포로 수용소의 실정을 탈출 포로와 국군설득단의 청취보고서를 통해 알아보겠다.
▲조규문씨(당시중립지대 친공포로수용소 포로·한국군 제1사단 15연대·하사=현 충남 오치원읍 거주·상업·47) <나는 52년 3월 입대, 서부전선 「베티」고지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가 됐었읍니다.
평남 강동·순천수용소 등에서 공산당의 허위선전과 세뇌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하다가 휴전 후 소위 송환을 거부하는 「친공포로」라는 명색으로 중립지대 인도군 관리하의 수용소로 옮겨왔어요.
신체가 건강한 포로들은 대부분 지원입대라는 미명 아래 「해방전사」로 공산군에 끌어넣어 전선으로 내보냈는데 나는 마침 목·다리 등에 중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중립지대까지 끌려나온 거예요. 상병포로 교환, 휴전 후의 전쟁포로 교환에도 빠진 나머지 포로들은 협박과 공갈로 적색포로를 만들어 인도군에 인계합디다.
북한공산군은 우리 「유엔」군 출신 잔류 포로들을 개성으로 데리고 와서는 「개별심사」 라는 것을 실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와 불원하는 자를 분리 수용합디다.
공산군은 심사에 앞서 『남한에 가보았자 포로가 됐던 한국군은 아주 학대한다. 여기에 그냥 남아 있으면 외국도 보내주고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등 감언이설의 선전을 했어요. 이같은 꾐수에 넘어가거나 협박에 못 이겨 송환을 거부한다는 포로가 생겼던 거예요.
나는 심사관에게 미처 대답을 못한 채 어물어물하다가 송환불원 포로 쪽으로 밀려 버리고 말았어요.
내 의사와는 전혀 달리 「친공포로」가 되고 보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더군요.
송환거부 친공포로들과 함께 수용돼 며칠을 지나고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고 모든 것이 속임수였다는 게 여실히 나타납디다. 우선 「후대」를 한다던 선전과는 달리 철저한 공산당조직으로 상호 감시를 시키더군요. 3명씩 조를 짜고 잠잘 때도 옷을 다 벗겨 옷은 다른 곳에 보관시키는 등 일거일동을 3인조가 서로 감시케 하는 거예요.

<학습·비판·토론의 연속>
특히 수용소 자체 안에서는 철부지로 날뛰는 새빨간 포로인 홍대규란 자가 괴수가 되어 행정협력위회라는 것을 조직, 지령을 받아가며 설쳐대는 데는 정말 생지옥 같고 못 견디겠더군요.
나는 이제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 기회만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는 내 키의 3배 정도나 되는 이중의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그 주변은 인도군이 경비를 하고 있었어요.
수용소 생활은 아주 규칙적이고 기계적이었는데 상오 6시 기상, 적기 게양과 학습이 시작되면 하오 9시 취침에 들어가기까지 온종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그 지겨운 공산학습과 비판, 토론의 연속뿐인 일과였어요. 이같은 일과는 수용소 안의 행정협력위가 모두 관장했어요. 관리책임을 맡은 인도군이 포로자체 생활을 간섭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중립지대 안의 친공포로 수용소는 완전한 공산세계였읍니다.
수용된 지 한 달쯤 지나니까 나도 모르게 「탈출」에 조급해지고 더 이상은 못 견디겠더군요. 이젠 부상당했던 상처들도 거의 아물고 또 몇 발짝만 건너뛰면 자유대한이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습디다.
10월25일 밤 취침시간에 벗은 옷을 슬쩍 담요 밑에 숨겨 넣어 깔고 억지로 자는 척하고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올 리가 있겠어요.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총총이 빛나는 것만 같고 고향의 부모 형제들이 금시 나를 껴안아 주는 듯한 환상으로 탈출 전야를 지새웠지요.
상오 2시쯤 눈을 뜨고 곤히 잠든 동포포로들의 동정을 살폈읍니다. 담요 속의 옷을 꺼내 움켜쥐고 살살 기어 수용소문을 나온 후 제일 어두운 쪽의 철조망을 향해 포복을 계속 했어요. 철조망 위에 옷을 걸어놓고는 「팬츠」바람으로 기어올라 첫 번째 「장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다음의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뛰어 넘었는데 다행히도 그 곳에는 인도군 경비병이 없는 곳이라서 발각되지 않았어요.
나는 이렇게 해서 공산 소굴을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26일 새벽 미군부대 막사로 뛰어들어 갔읍니다. 미군들은 주사를 놓아주고 잠을 즉 재워 줍디다.
잠에서 깨어보니 새 옷으로 깨끗이 갈아 입혀졌고 옆에는 각종 음식이 놓여 있더군요.
다음날 서울 수송국민학교로 후송돼 하루를 지낸 후 국군장교와 같이 고향집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상봉했읍니다.
이튿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수도육군 병원에서 10여일 입원했다가 정릉 우석대학으로 이동, 20여일간을 보냈어요.
탈출해 나와 보니 하루 앞서 제6사단 2연대 보병이었다가 역시 공산군에 포로가 돼 중립지대로 넘어왔던 김창회 전우가 탈출을 해 나왔고 또 10월초에는 미군 한 명이 넘어왔읍디다.

<인도군과 친하라 지령>
결국 내가 세 번째로 넘어온 셈이었는데 그후 11윌16일에는 두 아기를 가진 부부포로가 또다시 탈출 나왔어요.
내가 도망쳐 나온 후의 친공포로수용소는 밤에 잠자리에 들 때는 3명씩 쇳줄로 발목을 묶어 재우는 등 감시를 더욱 강화했던 모양입디다. 그러나 이들 부부 포로는 아기들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자게 했더군요.
원래 이들 부부는 전쟁초에 포로가 된 후 수용소 안에서 결합한 것이었는데 그동안에 아기를 둘이나 낳았고 공산군은 또 이들을 선전자료로 삼기 위해 수용소 안에서의 부부생활을 묵인했던 거였어요.
하여튼 이 부부포로는 공산당이 허용한 최후의 기회를 용감히 포착, 애들까지 무사히 데리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더군요.
나는 12월초 대구 보충대를 거쳐 다시 제1사단으로 원대 복귀, 계속 복무를 하다가 55년11월 만기제대를 하고 귀향했읍니다.>
다음은 작년 10월25일 탈출 귀환한 국군출신 김창회 포로로부터 당시 「유엔」군영에 나가 있던 한국군 설득장교들이 들은 중립지대 친공포로수용소 상황에 관한 청취보고서
『문=학습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답=(가)개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A 휴전협정 해설 B 국제정세 C 남한의 실정 D 북한의 전망 E 북한공산군사위원회 결정 90호 해설 F 중립지대에 들어가서의 태도 ▲조직강화 ▲인도군과의 교제에서의 경각심과 친밀성.
※설득에 대항하는 투쟁방법 ▲절대 거부할 것 ▲이론 수준 낮은 자는 「침묵전술」, 고도한 자는 「공격전술」을 취할 것 ▲절대적으로 냉정할 것 ▲설득을 중단시킬 교란전술을 쓸 것.
(나)중립지대에서 받은 학습내용
A 상기사항을 반복교육 받을 것이며 특히 인도군과 친선 도모하라는 지령을 받음 B 필히 1회 정도의 설득은 받자고 결의.
(다)공산당 기관지 및 보도사진을 보여주는 소련·중공의 산업생산에 대한 선전학습을 받았음.

<1분조 3명씩 상호 감시>
문=조직관계는?
답=친공포로 수용소 안에는 행정협력위원회라는 자체조직이 있어 지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음. 홍대규 위원장 밑에는 위생·학습·외교·규율·오락·경제 등 6명의 위원이 있고 밑에는 대조→소조→분조로 조직돼 있음. 분조는 3명씩 구성돼 상호 감시를 함.
문=포로들이 귀환을 거부하는 이유는?
답=A 송환되면 살해당한다는 공산군의 허위선전으로 인한 공포심 B 수용소 생활중 부역행위를 한 자들이 10%.』
◆주요일지 (1953년6윌2일∼5일) ※2일 ▲금화서북방서 격전 ▲이대통령, 미국과의 협조 다짐 ▲주은래, 영 여왕 대관식에 축전
※3일 ▲B 29, 철의 삼각지를 5시간 폭격 ▲하 외무, 한·미 방위조약 체결 역설 ▲미 상원, 중공의 「유엔」가입을 만장일치로 반대 ▲불의 「망데스·프랑스」씨 조각 성공
※4일 ▲「피의 능선」서 격전 계속 ▲최덕신 대표, 휴전회담 계속 불참 ▲인천지구의 일인 기술자 60명을 한국인으로 대치 ▲ 「유엔」참전 16개국, 비밀회담
※5일 ▲ 「미그」기 3대 격추 ▲마산의 반공포로들 휴전 반대「데모」 ▲휴전회담 급진전 ▲이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