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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릉 설왕설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경주 고분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 고분은 흙을 파고 쌓는 도구가 기계화하지 못한 1천수백년전의 거대한 봉토로 되었다.
봉토의 토량은 89호분과 같은 큰 것일 경우 2천4백「루베」(입방m). 하루 한사람이 3∼4「루베」밖에 파지 못하므로 거기에 동원된 인력을 가히 상상할만 하다.
또 적석분일 경우 수천개의 냇돌을 주워 모아야 하는데 시내주변에선 그런 돌이 없다. 이러한 토역에는 굉장한 인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경주 고분이야말로 지배자 내지 권력용의 그것임에는 틀림없다.
신라 56대 제왕 가운데 사적으로 지정된 왕릉이 29기. 오릉이 박혁거세와 그 비 및 남해왕·유리왕·사사왕릉이라 추정하고 괘천은 원성왕릉, 또 구정리 방형분도 왕릉이라 본다 해도 모두 30기 남짓하다. 그러나 막상 태종 무열왕릉만이 비명이 확실한 유일 예이고 그밖에 법전·신문·흥덕 능이 비교적 확실하다.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효성왕·선덕왕·원성왕은 수장 혹은 화장했다고 한다.
「전민애왕릉」의 경우는 너무도 긴가 민가의 상태이고 그밖에 근년에 지정한 몇 왕릉 역시 다소의 반론이 없지 않다.
김유신 묘에 대한 이병훈·김상기 박사의 진부 논쟁은 곧 그들 고분의 주인공을 확정하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신라왕릉의 진안설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벌써 임진란 후부터 대두된 숙종 때의 선비 화계류선건이 암시 있는 얘기를 남기고 있다. 영조 때의 경주부윤 김시형이 11기밖에 알려지지 않은 왕릉을 갑자기 28기로 늘려 김씨 왕릉을 많이 확정 시켜 놓은데 대한 야유이다.
신라왕릉은 박·석·김의 3성씨로 이어졌다. 혁거세부터 8대 아달나까지 그리고 53대 신덕에서 55대 경애까지 2백21년간은 박씨, 4대 탈해와 9대 벌휴에서 16대 흘해에 이르는 1백73년간은 석씨, 13대 미향와 17대 나물왕 이후 5백88년간은 김씨에 의해 계승되었다.
경주시내의 남쪽이며 남산서록인 양산촌은 건국초 박씨의 근거지였다. 인근에 혁거세가 탄생했다는 당정이 있고 오릉과 일성왕릉도 가까운 거리. 양산촌은 남산을 배경 삼아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이다. 어쩌면 양산촌에서 인왕리 고분과 남천에 이르는 지역이 신라 초기의 도읍판도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탈해왕릉이 금강산 아래 동천리에 위치하는 것은 그 지역이 석씨 판도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탈해는 동해안 아진포에 상륙해 토함산을 근거로 살았고 죽어서도 토함산 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강산은 바로 토함산 서쪽의 영봉이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연지는 월성옆 계림을 근거지로 하여 태자로까지 책봉되며 그 7대손 미추가 왕위에 오른다. 뒤에 미추의 조카 내물이 왕권을 잡고 신라의 국체를 일대 개혁했다. 미추왕릉(황남리)과 내물왕릉(교동)이 모두 계림측근에 위치하고 궁궐이 월성으로 되는 것도 김씨 부족의 새 판도를 설명해 주는 것이 된다.
이같은 이치는 그 이후에도 계속 적용해 봄직 하다.
왕손이 흩어져 각기 세력을 형성하고 국권을 장악함에 따라 주산과 분묘의 위치도 바뀌는 것이다. 26대 진평왕릉은 명활산과 낭산사이의 보문동에 있고 그의 딸 선덕여왕부터 낭산 일대가 성역화 하였다. 삼국통일 전후해서는 서악일대의 세력이 지배하고, 그무렵 가야왕손 김유신을 중심한 사람들은 이웃 충효리에 자리잡지 않았을까.
또 흥덕왕릉이 멀리 안강에 있고 민애왕의 「쿠데타」가 여기를 기반으로 한 것도 왕손토호의 근거지를 암시한다.
이같이 풀이해 간다면 경주고분의 성격은 대충 그어지는것 같으며 지금의 선산개념도 그런데 유인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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