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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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오래된 유머다. 글자 한 자 잘못 띄어 쓰면 모든 게 달라진다. ‘서울시 장애인 모임’이 ‘서울시장 애인 모임’으로 바뀌면 큰 일이다. ‘무지개 같은 사장님’이 ‘무지 개같은 사장님’으로 둔갑하면 그걸로 끝이다. 이렇게 무거운 말과 글이 요즘처럼 사나워진 때가 없다. 여성 대통령에게 “국민 세금으로 만든 것(철도)을 왜 팔어. 그렇게 팔고 싶으면 몸이나 팔아”라는 악담을 퍼붓는다. “국민들만 보고 묵묵히 가겠다”는 대통령의 발언까지 도마에 오른다. 일부 네티즌들은 “국민들 안 보고 묵묵히 가겠다”는 댓글로 바꿔친 뒤 자기들끼리 요란하게 ‘좋아요’를 누른다.

 독일 나치의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장관은 선동의 대가다. 그는 “선동은 한 문장만 있으면 된다. 이를 해명하려면 많은 자료와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명이 끝날 즈음 사람들은 선동한 내용만 기억한다”고 했다. 괴벨스는 거짓말마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최고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정하고 의심하지만, 결국은 믿게 된다”고 했다. 선동은 나치의 비밀병기였다.

 우리 사회는 괴담에 약한 편이다. 광우병 괴담에 이어 지금은 민영화 괴담이 판을 치고 있다. 감정선을 자극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대학가를 도배하고, 사이버 세상은 “코레일이 민영화되면 지하철 요금 5000원”이란 끔찍한 소문이 점령한 지 오래다. 괴벨스는 “공포와 증오는 강력한 힘이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훨씬 쉽게 속는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괴담에도 작은 진실과, 더 큰 공포심이 섞여 있다. 자꾸 괴벨스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입장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KTX 수술에 반대한다면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17조6000억원의 부채에다 해마다 5000억~7000억원씩 쌓이는 영업적자는 그대로 덮어두자는 것이다. 결국 납세자들이 혈세를 퍼부을 것인가, 아니면 코레일을 개혁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해 못할 좌파진영의 이중성은 또 있다. 대외개방에 반대하면서 걸핏하면 유럽의 실패사례를 끌어대는 것이다. 민영화 참고사례는 국내에도 널려 있다. 포스코는 민영화를 통해 세계 최강의 철강기업으로 거듭났다. 반면 무늬만 민영화된 대표적 케이스는 KT다. 공기업 체질을 끊지 못해 SKT와 매출액이 비슷하면서도 직원은 6배나 많다.

 그렇다고 청와대와 정부의 대응에도 영 믿음이 안 간다. 영국의 석학인 폴 존슨은 “역사야말로 현재의 문제를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장으로 돌아가 보자.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라는 책문에 임숙영은 이렇게 적었다. “나라의 가장 큰 병은 임금에게 있다. 정신 못 차리는 왕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 답안지를 본 임금이 그를 벌하라고 펄펄 뛴 게 당연하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 다음이다. 좌의정 이항복과 승정원(현 청와대 비서실)이 총대를 멨다. “전하! 그리하면 언로가 막히고 나라가 망합니다”라고 목을 내놓고 간언했다. 4개월 뒤 임숙영은 무사히 벼슬길에 올랐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장면이 그 무시무시한 광해군 때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4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더 진화했는가. 청와대와 내각이 당시 좌의정과 승정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지 자신이 없다.

 한쪽에선 막말을 서슴지 않고, 반대편에는 대통령의 지시사항만 일방통행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좌우를 떠나 부끄러움을 잊은 게 가장 큰 병이 아닐까 싶다. 오늘 따라 40년 전 박완서 선생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자꾸 떠오른다.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모자라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것이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훨훨 휘날리고 싶다.” 그래, 우리는 아마 박완서에게서 부끄러움부터 배워야 할 듯싶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