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덩샤오핑 천하’ 눈앞에 … 18개월 암투 막 내리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4호 29면

실권 장악 후, 당·정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 1978년 9월 11일, 평양 모란봉.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타협의 명수였지만, 당 주석 화궈펑이 왕둥싱을 통해 타협안을 제시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혁명 1세대들이 “마오 주석이 생전에 내렸던 결정을 무조건 따르고 준수해야 한다”는 화궈펑의 주장을 비판하고, 민중들이 자신의 복귀를 주장하는 마당에 타협은 사치였다. 20년 전 모스크바에서 들었던 마오쩌둥의 연설이 떠올랐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3>

1957년 11월 18일, 소련공산당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소련에 체류 중이던 마오쩌둥에게 특강을 요청했다. 마오는 거절하지 않았다. 펑더화이, 덩샤오핑, 리셴녠을 대동하고 ‘단결의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멋진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중 한 구절이 덩샤오핑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레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착오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나도 착오를 범한 적이 있다. 그러나 착오를 겪으면서 유익한 것을 많이 얻었다.” 덩샤오핑은 단정했다. ‘화궈펑은 마오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덩샤오핑은 자신감이 생겼다. 대놓고 화궈펑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자신의 말 중에 잘못된 점이 많았다고 여러 번 인정했다. 무조건 준수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나 레닌도 마찬가지다. 화궈펑의 이론은 틀려먹었다.”

복직 9일 만인 1976년 7월 30일 저녁, 중국-홍콩 축구대표팀의 경기장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덩샤오핑. 왼쪽은 부총리 리셴녠.

이어서 지식과 인재를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내에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지식인을 존중하지 않는 잘못된 사상에 반대한다.” 이 한마디에 지식인들은 입을 헤 벌렸다. 평소 대접받지 못할 짓도 많이 했지만, 문혁 시절 4인방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는 짓은 더 반동적”이라며 지식인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과학·기술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현대화 실현의 관건은 과학과 기술력의 향상이다.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현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스스로 인정해야 희망이 있다. 현재 중국의 과학기술 교육은 20년 이상 낙후돼 있다.”

1976년 7월 16일, 중공 제10차 전국대표자대회 3번째 중앙위원회 회의(三中全會)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4인방 몰락 이후 첫 번째 회의였다. 부주석 예젠잉은 화궈펑을 치켜세웠다. “영도자의 지위가 안정돼야 한다. 우리 당의 사업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우리에게 화궈펑 주석을 선전하고, 마오 주석의 영수 지위를 공고히 하라는 의무를 부여했다.”

그러곤 덩샤오핑의 복직을 주장했다. 화궈펑을 포함한 중앙위원 전체가 예젠잉의 제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왕둥싱도 대세에 순응했다.

회의 마지막 날인 7월 21일 4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화궈펑 동지의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을 추인한다. 덩샤오핑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당 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복귀시킨다. 4인방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그간 맡았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한다.”

4가지 결의안 중, 덩샤오핑의 복직을 제외한 나머지 3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21일 오후, 폐막식에서 덩샤오핑이 폐회사를 했다. 침묵 1년 만에 입을 열었다. “내 나이 73세, 여년(餘年)을 당과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하라니 우선은 기쁘고, 당원들의 신임에 감사한다. 이삼십 년 더 살고 싶지만 소망일 뿐,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의지를 조롱한다. 아직 건강한 편이라 몇 년간은 일에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사심과 잡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보니, 성실하게 당원의 책임을 다하고 당의 안배와 명령에 복종하겠다. 마오쩌둥 사상은 우리 당의 지도사상이다. 린뱌오는 주석의 사상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분리시켰다. 엄중한 왜곡이다. 마오쩌둥 동지의 말은 어느 상황이건 항상 정확했다. 단, 시간과 조건이 다르면 말을 바꾼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특히 4인방의 이론가로 자처하던 장춘차오는 마오쩌둥 사상을 왜곡하다 못해 멋대로 뜯어고치고 해석해서 모두를 기만했다. 정확하고 완전무결한 마오쩌둥 사상을 우리 당의 지도방침으로 삼아야 한다. 군중노선(群衆路線)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하루도 잊지 않겠다.”

린뱌오와 장춘차오에 빗대 화궈펑의 이론을 비판한 거나 다름없었다.

덩샤오핑의 정계복귀 발표는 중국과 전 세계를 진동시켰다. 정부는 대규모 환영 시위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집회에는 모른 체했다.

덩샤오핑은 축구광이었다. 7월 30일 오후 8시, 베이징 공인체육장(工人體育場)에서 벌어진 중국-홍콩 대표팀 축구경기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경기장을 메운 8만 관중은 저우언라이 영결식 이후 모습을 감췄던, 1m57㎝의 작은 노인이 입장하자 기립박수를 보내며 열광했다. 2대1로 이겼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 팀이 득점했을 때보다 전반전 끝나고 덩샤오핑이 잠시 일어났을 때 박수소리가 더 요란했다.

당시 당 부주석은 예젠잉이 유일했다. 부주석에 복직한 덩샤오핑은 서열 3위였다. 80회 생일을 마친 예젠잉은 나이를 이유로 일선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정치국 서열 4위였던 왕둥싱도 “나는 머리가 나쁘다”며 몸을 사렸다. 어느 누구도 덩샤오핑의 천하가 임박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18개월 동안 떠들썩했던 덩샤오핑 복귀 문제는 외부세계의 내로라하는 중국 전문가들을 3류 점쟁이로 전락시키고 막을 내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