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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영웅들 스크린 누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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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개봉하는 ‘데어데블’(15세 이상 관람가)의 주인공 데어데블은 앞을 보지 못한다. 대신 청각과 촉각, 균형 감각 등이 초인적으로 발달했다.

그 초능력으로 정의를 수호한다. 애초에 데어데블의 정의 수호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이다. 결함으로 얻은 능력, 복수에서 시작된 정의. ‘데어데블’의 모든 것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 ‘데어데블’을 비롯해 ‘스파이더 맨’등 미국 만화 주인공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만화 주인공처럼 절대적인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내면의 분노와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는 수퍼 히어로는 현대인의 고뇌를 대변한다. 그리고 만화 특유의 현란한 액션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놓은 특수효과 덕택에 만화의 주인공들은 마음껏 스크린을 누비게 됐다.

어린 시절 방사능 폐기물에 눈을 다친 매트 머독(벤 에플렉)은 시력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이 초인적으로 발달한다. 그는 권투선수였던 아버지가 악당 킹핀에게 살해당하자 약자를 위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성인이 된 매트는 낮에는 빈민가의 변호사로, 밤에는 데어데블로 변신해 악인에게 심판을 내린다. 그는 연인인 엘렉트라(제니퍼 가너)의 아버지가 킹핀이 보낸 자객 불스아이(콜린 파렐)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엘렉트라는 데어데블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오해한다.

데어데블이 기존의 수퍼 히어로와 다른 점은 마치 신과 같은 초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눈에서 광선이 나온다거나 엄청난 괴력으로 상대를 압도한다거나 하지 못한다. 대신 레이더처럼 음파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고 뛰어난 균형 감각으로 건물 사이를 쇠줄 하나에 의존해 날아다니는 정도다.

그런 점에서는 배트맨과 흡사하다. 가면을 쓰게 된 사연도 비슷하다. 아버지가 악당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정의를 수호하는 자가 된 것이다. 혹시 이건 단순한 복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똑같다.

1964년 시작된 '데어데블'의 원작 만화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섬뜩하게 변화한다. 데어데블은 악의 처단을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악한 영웅이 된다. '사이먼 버치'로 화려하게 데뷔한 감독 마크 스티브 존슨은 어린 시절부터 이 만화의 팬이었고 자신이 숭배하던 영웅을 스크린에 화려하게 옮겨놓았다.

'데어데블'의 액션은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데어데블은 귀로 모든 것을 본다. 비가 오면 엘렉트라의 얼굴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정확하게는 이미지로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이지만. 악당과 싸울 때도 데어데블은 소리로 모든 것을 본다.

미국에는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라는 양대 만화 전문 레이블이 있다. DC코믹스의 '슈퍼맨'과 '배트맨'이 80년대와 90년대 초 큰 성공을 거둔 뒤 최근에는 마블 코믹스의 '엑스맨'과 '스파이더 맨'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마블 코믹스의 만화로는 '데어데블'에 이어 '엑스맨 2''헐크'가 개봉 대기 중이고 내년에는 '판타스틱 포''고스트 라이더즈'등이 기다린다.

만화의 수퍼 히어로가 줄줄이 스크린에 입성하는 이유는 우선 특수효과 덕분이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에 몸을 매달고 뉴욕의 빌딩 숲을 종횡무진 누비는 광경을 스크린에서 보는 일은 정말 짜릿하다. 게다가 무조건 선과 악을 가르고 정의의 수호신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물어본다.

자신이 과연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 늘 회의한다. 슈퍼 히어로의 활약이 담긴 만화에도 성인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만화 세대'가 감독으로 활약하는 시대다. '배트맨'의 팀 버튼부터 '식스 센스''언브레이커블'의 M 나이트 샤말란, '헐크'의 리안, '체이싱 에이미'의 케빈 스미스, '배트맨5'를 연출할 '레퀴엠'의 대런 애로노프스키까지 모두가 만화광이다.

이들은 자신이 반했던 만화를 영화로 옮기고 싶어 하고 만화의 표현주의적 특성을 살려 독특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흥행과 예술 모두 정상에 올랐던 '배트맨'의 신화를 재현하고 싶은 것이다. 반드시 정상이 아니어도 '데어데블'은 원작의 세련된 재연만으로도 즐겁고 화끈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화의 영화화는 결코 멈출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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