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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느새 봄을 재촉하는 실비가 한줄기 두 줄기 뿌려 지고 있다. 밤11시25분. 태어나서 여태까지 별반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그이.
제대 한 뒤 직장이 마땅치 않아 1년을 놀더니 지루하고 초조로 움에 못 이겨 불황에 허덕이는 경제사정인데도 과감하게 부딪혀 보겠다고 TV중개상업을 시작한지두어달이 지났다.
간혹, 하는 일이 잘 되냐고 묻고 싶어도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과 혈거워진 바지 통에 시선이 멈추면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슬그머니말문을 닫아버리고 마는 요즈음이다.
1년을 놀 때 어쩌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면 아침 일찍 출근하여 꼭 밤12시5분전에 귀가한다하여 하숙생이란별명을 가진 한이네 아빠가 부러워 보이던 그 마음에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는 요즈음의 생활이다.
매일 김치·김치찌개로 저녁상을 보아 왔는데 오늘은 시아버님께서 햇닭 2마리를 사오셔서 푹 고아 영계백숙을 하여 놓고 파래에다 무를 채쳐 무치고 오랜만에 아끼던 명란젓도 꺼내어 상을 차려놓고 대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무심한 빗방울소리만 토닥토닥 높아간다.
그 알랑한 영계백숙 파래무침 명란젓이 가지런한 상차림 때문에 어느 날보다 더욱더 간절하게『어서 돌아와 주었으면』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여자만이 가길 수 있는 작은 정성일 것이다.
나날이 더 심해 가는 경쟁사회에서 정당한 노력이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거기서 노력하는 남편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주부들이 살뜰히 차린 저녁상을 앞에 놓고 하루의 무사를 빌며 기다리는가를 생각하면 남성들은 대폿집의 유혹을 쉽게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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