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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691)<제31화>내가아는 박헌영(9)-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두파의 공산당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이른바 초기 공산주의 운동자 가운데는 이동휘가 이끈 상해파 고려 공산당(책임위원 이동휘)과 그보다 조금 늦게 조직된 「일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두파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두파의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심한 파벌싸움을 벌여왔다.
내가 여기서 초기 공산주의자들의 두 계보를 굳이 얘기해보려고 하는 것은 상해로 망명한 박헌영이 나중에 어느 파벌의 공산당 활동에 가담하는가를 가려보기 위해서이다.
독립사상을 품고 조국을 떠나 「시베리아」에 방황하던 열혈 애국자 이동휘는 1918년 「하바로스크」에서 제정 「러시아」시대에 「모스크바」대학 정치학과를 나오고 당시 「소비에트·러시아」정부에서도 상당한 신임을 얻고있던 박진순을 알게되었다.
또 이동휘는 역시 「러시아」영주자인 이민 2세 박애(마다베이·박) 을 알게되어 소련인「그레고리노프」의 후원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그때가 1918년 6월26일.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 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독립의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 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 운동자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뭏든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 운동자이었다.
1873년 함남 단천에서 출생한 그는 강성하여 단천목사 밑에서 아전으로 있었으나 목사의 부정부패를 곁에서 보다못해 청동화로를 뒤집어씌우고 그길로 서울로 도망쳐 무과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삼남순찰사로 전북 이리에 갔을때의 일화 하나가 있다.
그는 병졸을 거느리고 행차도중 소를 몰고 지나가는 농부에게 돌연 큰소리로 『소를 놓고가라』고 고함쳤다.
질겁한 농부가 그만 소를 놓고 달아나자 병졸을 시켜 농부를 잡아오게 한 뒤 볼기를 치면서 『어찌 위세있는자가 소를 달라기로서니 자기소를 그대로 빼앗기느냐』고 훈계했다는 것이다.
수원삼령으로 있을 당시 군대가 해산되자 이동휘는 기독교에 입문, 「캐나다」선교사 「그리어슨」밑에서 전도사 노릇도 했다.
그가 전도할 때는 어찌나 눈물어린 애국호소를 열렬히 했던지 듣는 사람마다 나라를 잃은설움에 울지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간도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연해주로 딸 하나만 데리고 망명했으나 일경이 그의 어머니를 학살해 반일감정이 더욱 짙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블셰비키」집단의 후원을 받아 한인 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는 창당활동을 할 여유도 없이 일제의 「시베리아」출병으로 궁지에 빠져 「하바로스크」에서 「블라디보스트크」로 옮겼다가 마침 1919년 3·1운동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해에 간다.
사위를 대동하고 그해 8월 30일 상해에 도착한 이동휘는 곧 상해 불조계 하비노에 사무소를 설치한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대통령은 이승만)로 취임했다.
그가 당시 쟁쟁한 인사들이 모여있던 임정의 초대국무총리 자리에 무난히 취임한 것은 물론 20만「러시아」한인의 배경에 힘입은 것이었지만 얼마만큼 출중한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가 상해로 떠나자 반대파별의 세력들은 국무 총리자리가 탐이나서 「시베리아」를 떠났다고 많은 비난을 했다고 한다.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동휘는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서 「4월참변」을 피해 돈 4만원의 거금을 갖고 온 「볼셰비키」의 한인공작원 김만겸과 함께 1921년 1월10일 한인 사회당 대표자 회의를 열어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었다.
「4월참변」이란 1920년 4월4일밤 「시베리아」에 적군파소탕을 위해 출병한 일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을 기습, 무차별 학살행위를 한 사건이다.
여기에 나오는 김만겸이 나중에 박태영을 크게 신임하게 된다.
그는 김만겸과 함께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던 여달형을 포섭하는데 성공했으며 임정「그룹」의 조완구·신채호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자들을 당원으로 끌여들였다.
그때의 공산주의 시대는 말이 공산주의지 선언서·강령·규약 등도 없었고 다만 국제당의승인을 얻어 독립운동을 하자는데 전념했었다한다.
이동휘는 이어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대표회의를 열어 『무산자는 뭉치라』는 등의 이른바 선언을 채택하고 그해 6월 그의 당을 『유일 정통한 고려공산당』임을 인식시키기 위해「모스크바」에 갔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레닌」과도 회견했다.
「레닌」이 당시 한국의 혁명 운동방법론에 대해서 3가지를 물었으나 모두 엉뚱한 대답을 해 웃겼다는「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레닌」이 첫 질문으로 혁명운동의 단계론을 묻자 이동휘는 대뜸 공산혁명으로 밀면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레닌」은 당시의 한국에는 노동자 조직이 없으니 먼저 민족운동을 일으키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어 한국의 경제사정을 물었으나 이동휘는 통계지식이 없어 대답을 못하고 말았으며 세번째로는「레닌」이 혁명에 자금이 얼마나 들겠느냐고 묻자 이는 절반「루블」정도면 족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닌」은 그런 큰일에 수백만 「루를」은 있어야 할 것인데 단돈 40만「루블」이냐고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는 것이다. 반세기전 얘기니 있을법한 일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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