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제30화>서북청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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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청의 스폰서>
서청은 밖으로 목숨을 내건 싸움을 벌이는 일방, 안으로는 생존을 위해 피나는 몸부림을 쳐야했다.
서청이 갖고있는 재산은 오로지 맨주먹 하나뿐. 반좌투쟁은 이 맨주먹만으로도 가능한일이었지만 살림살이는 이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에서 열까지 「스폰서」를 찾아 발버둥을 쳐야 했다.
재정과의 싸움은 피난민들인 서청에겐 반좌싸움 이상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따라서 말못할 수법이 강구되기도 했다.
서청이 살림살이를 꾸러가는방법은 대체로 ▲당국의 협조를 받는 것 ▲독지가의 기부를 구하는 것 두가지였다.
이중 당국과의 협조란 유령통장을 만들어 부정배급을 받는 말하자면 협잡이었다.
당시는 군정청에서 월남 피난민들에게 쌀·보리쌀·밀가루·옥수수동 양식과 이불·담요·의류등을 유·무상으로 배급해줄 때.
서청은 이제도를 이용. 기왕에 협조관계가 트인 조병옥경무부장·장택상수도청장및 이북출신인 오정수상공부장(평남) 한승인 상역국장(평남) 등과짜고 배급을 뭉턱뭉턱 타냈다.
방법은 앞에 말한것처럼 각합숙소의 대원숫자를 배로 늘려 무장배급을 신청하거나 유상배급을 신청해 담당 한국장등 관계자의 묵인아래 물품을 타내는 것이었다.
이같이해서 타낸 구호품은 우선 대원들의 생활에 쓰고 경우에따라서는 일부를 유출시켜 그돈으로 부식도사고 아쉬운대로 활동자금에 충당하기도했다. 당시는 시중물가가 워낙 비쌌기때문에 유상배급을타도 유출시키면 적잖은 「프리미엄」이 떨어져 재미가 괜찮았다.
이같은 부정급식은 죽은 김성주사업부장과 김경신차장등이 도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서청의 살림살이를 언제까지나 부정에 의존시킬수는 없는일. 서청의 간부들은 독지가의 기부를 구하러 저마다 연줄을 찾아 동분서주해야만했다.
대상은 대체로 이북출신 실업가들이었다.
위원장 선우기성동지는 고향(평북정주) 사람인 삼흥실업(고무공장 및 무역·만리동 소재)전무 최태섭씨(현 한국유리대표), 같은 전무인 서선하씨(평북강계), 박창일씨(정주), 신영피복(대연각「호텔」뒷골목) 대표 이영씨(평북박천), 현현대건설서 사업을한 승상배씨(정주·현동화기업 대표), 동아산업을 경영한 이한원씨(평남강서·현대한제분대표). 무역업을한 명윤화씨(박천)등을 찾아다녔다.
6·25때 구월산부대장을 한 김종벽동지는 황해도은율동향인 조동익씨 (당시 직포공장경영·현칠성「사이다」). 김원모씨(마포서 양조장경영)등을 찾았고 해주「클럽」인 수양지부(지부장 이영호)는 살림살이를 최성모씨(현대한생명회장·황해도)에게 전적으로 기댔다.
특히 최성모씨는 황해도지부장인 김인식동지에게 후암동에 25만원짜리 집을 사주는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밖에 김성주 한관제 김경신 장창원 반성환동지등도 각각 고향사람을 찾아 뛴것은 물론이다.
이들 실업가들에게서 얻어오는 돈은 요샛돈으로 쳐서 한번에 10만원 안팎. 자주 신세를 지다 보니 목돈을 못얻고 자연 푼돈으로 절하돼 몇푼얻어도 밑빠진 독에 물붇는 격이었다. 개중에는 이것마저 선뜻 내놓지를 않아 실업가들게 협조를 받으러 다니는 것은 구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문에 신세를 지는 횟수는 자꾸만 늘어간 반면, 살림살이는 언제나 불안해 대원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선우기성동지는 숙소마저 못구하고 쩔쩔매다가 반성환훈련부장이 용산중앞 모 2층집에 빈방이 있는것을 알아내고 싫어하는 선점자 김모씨(윌남민)를 두들겨패 방1간을 비우게한 덕택에 간신히 잠가리를 얻기까지했다.
식생활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배급은탔지만 가끔 양식을 내다팔아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바람에 하루 두끼를 먹으면 잘먹는 편이었으며 대개는 한끼가 고작이었다.
반찬도 새우 말린것과 단무지면 일품. 주먹밥에 간장과 소금을 쳐먹는 것이 보통의 「메뉴」였다.
심지어 허기를 참다못해 신발 및 옷가지까지 내마팔아 맨발로 쏘다니거나 「러닝·샤쓰」바람으로 나다니는 대원도 수두룩했다.
실제 호림장합숙소에선 빨래를 해놓으면 먼저 입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웃도리만 걸치는 사람, 바지만 입는 사람등 꼴들이 가관이었으며 반성환동지는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웃도리를 언제나 못차지해 「러닝·샤쓰」 바람일때가 많았다.
선우기성동지의 부인은 그때 얼마나 배를 곯았던지 지금까지도 『당신, 내가 얼마나 굶었는지 아느냐』며 곧잘 대든다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은 고민이 연료문제. 양식과 옷가지는 군정청에라도 기대면 어느정도 해결됐지만 연료문제는 기댈곳마저 없었다.
그래서 호림장에서 취사당번을 맡은 강소인양(청진·당시중앙대국문과1년·부녀부상임)및 동향 장복순양(당시19세)등 여자대원들은 남의집 담너머로 장작개비를 빼내 밥을 짓기도 했으며 그것도 안되는 날엔 식당에 나가 버린 젓가락을 주워오기까지 했다.
본부 또한 추운겨울에도 난로를 못피우고 오돌오돌 떨어야만 했다.
이처럼 비참한 생활은 종내 갖가지 부작용, 즉 공갈행각을 수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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