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았으니 … 미국·쿠바 관계 풀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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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 적대국 지도자 간의 해빙 무드를 상징하는 제스처’냐, 아니면 ‘불가피한 의례적인 인사’일 뿐이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식에서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한 의미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백악관은 “사전에 계획된 만남이 아니었다”며 과잉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독재자와의 악수’를 맹비난하고 있는 강경파를 의식해서다.

 하지만 외교무대에서의 의전을 중요시하는 미국 정부는 추도식에서의 오바마와 카스트로의 조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남아공 당국에 적극 반대의사를 표시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를 두고 오바마 정부가 이란에 이어 쿠바까지 해빙 대상으로 확대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받고 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칼 미첨은 “(미국의 대쿠바) 정책 변화의 신호탄이 될 수 있는 상징적 제스처”라고 평가했다고 미 공영방송 NPR이 전했다. 플로리다 국제대의 쿠바 연구소장 조지 듀어니는 “악수만으로 두 나라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는 적어도 미래에 두 나라에 가져다줄 변화에 대한 건강한 징조”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미국과 쿠바 관계에는 해빙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오바마는 지난달 8일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았다”며 “1961년부터 시행된 대쿠바 정책이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책을 현실에 맞게 손질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앞서 2009년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악수했다. 지난 9월에는 유엔 총회에 참석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오바마의 화해 제스처가 앞마당의 적 쿠바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라울의 형 피델 카스트로가 59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미·쿠바는 반세기 넘게 적대적인 관계를 이어왔다. 미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쿠바 제재에 들어갔다. 쿠바는 경제에 직격탄을 맞았지만 소련·베네수엘라 등의 원조를 받아 버텨냈다. 고립시키는 것만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델이 건강문제로 라울에게 실권을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난 2006년 이후 쿠바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라울은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뚜렷한 개혁·개방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국영사업 중 200여 종의 자영업이 허용되고 자유무역특별구역이 마련됐다. 라울 정부는 또 국민의 휴대전화 소유, 관광호텔 숙박 금지 등 조치를 풀었다. 부동산과 중고자동차 매매 규제도 완화됐다. 최근에는 국영기업의 철강·시멘트 등 잉여 재고품의 도매 처분도 허용했다.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는 “이는 곧 시행될 자유시장체제 도입의 예행 연습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태환·불태환 페소로 나뉜 이중통화 체제도 폐지된다. 로드리고 말미에르카 쿠바 대외무역투자부 장관은 최근 아바나 국제박람회에서 “안심하고 쿠바 무역특구에 투자해도 된다”고 호소했다.

 미국도 라울 의장의 개혁조치에 상응해 오바마 집권 이후 쿠바에 대한 제재를 대폭 완화하고 있다. 미국민이 교육·종교적 목적으로 쿠바를 여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송금·비자 규제도 완화됐다. 마약 수송 차단, 항공·해상 구조 협력, 민간 항공기 전세기 취항 등도 뒤따랐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이 200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악수한 뒤 몇 달 만에 미국 농산물의 쿠바 수출이 허용됐다. 제비 한 마리가 찾아왔다고 봄이 온 건 아니지만 이번 오바마·카스트로의 악수는 해빙의 기운을 알려주는 서곡일 수 있다. 오바마 정부가 이란에 이어 쿠바까지 끌어안기에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아직은 너무 크다. 하지만 쿠바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제재를 유지·강화하려는 지난 반세기의 미국 정책에 서서히 변화가 일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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