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독립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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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하와이」와 미주에 이민자 한국 동포들이 벌인 항일 및 독립운동은 시국광복 운동의 큰 몫을 차지했다. 이민 초기부터 꾸준히 계속된 조국 광복 운동은 1919년의 3·1 독립선언을 전후로 전기의 항일 운동과 후기의 독립운동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하와이」동포의 항일 운동은 이민 2년 만인 1905년 일본이 고종 황제를 위협하여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 외교권을 빼앗자 곧 바로 시작됐다.
1906년2윌 주재하던 대한 제국 정부의 공사와 영사가 소환케 됐을 때「하와이」와 미주의 한인들은 재미한인 공동 대회를 열고 배일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하고「하와이」의 「에와」 친목회(회장 정원명)와 미주공립협회(회장 안창호) 공동 이름으로 그 결의문을 본국 정부에 보냈다. 이 밖에도「하와이」의 「와이파후」공동회·혈성단·자강회·공진회·노소동맹회·국민공동회·국민단합회·신간회·복흥회 등 각 지역교민단체들이 일제히 일화배척을 결의하고 항일운동 기구로 전환했다.

<일화 배척 운동도 전개>
이로부터 재미한인들은 힘을 모아 미국의 정치·종교 등 각종 단체 대회와 구미에서 국제회의가 있을 때마다 대표를 보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유력한 언론 기관을 통해 우리민족의 실정을 알리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했다.
이에 앞서 1905년 초 친일적이었던 미국의「디어도·루스벨드」대통령이 일본으로 하여금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일·노 강화조약을 미수「포츠머드」에서 열도록 주선했다.
그때「태프트」미 육군장관은 일본의 강화조건을 사건 타진 차 동경으로 가는 길에「호놀룰루」에 들렸다.
「하와이」동포들은 기회를 놓칠 새라 감리교목사「J·W·워드먼」과 의논하여 재미한인대표를 강화회의에 파견키로 하고 그를 통해「하와이」총독대리 「애트킨슨」의 협조를 얻어 윤병구 목사를 한인대표로 뽑아「태프트」에게 인사시키고「루스벨트」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얻어냈다.
윤 목사는 미 본토에서 유학 중이던 이승만씨와 합류, 백악관에서의「루스벨트」대통령 면담을 요청, 청원서를 제출했다. 8월 초「뉴요크」별장에서 휴양 중이던「루스벨트」는 『사건이 중대하니 귀국 공사대리 김간정을 통해 제출하라』고 청원서접수를 거절했다(김 공사대리는 본국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청원을 제출치 않음). 윤 목사와 이승만씨가「루스벨트」를 찾아갔을 때는 미·일 간에 한국에서의 일본의 권익을 보장하는「태프트」-「가쓰라」 비밀 각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여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1905년「하와이」에 농장 노동자로 이민 왔던 이재명 의사는「헤이그」밀사사건을 전해듣자 그해 10월 선편으로 귀국, 1909년 경성에서 이완용의 가슴을 찔러 증상을 입히고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외교 고문이던 미국인「스티븐즈」가「샌프런시스코」에서 신문을 통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옹호하고,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공립협회는 최정익씨 등 4명을 대표로 보내「스티븐즈」에게 항의하고 정정·사과를 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런 후 「스티븐즈」가 일본영사와 함께「워싱턴」으로 가려고 정거장에 나타나자 대동보 국회회원인 장인환, 공립협회의 전명운 의사가「스티븐즈」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장·전 두 의사는 모두 「하와이」로 이민 왔다가 미국 본토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이던 분들이다.

<스티븐즈에 사과요구>
장·전 두 의사가 재만에 회부되자 교포들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연합으로 후원회를 조직, 당시「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로 받은 이승만씨를 통역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씨는 학교일 때문에 통역을 맡을 수 없다해서「로스앤젤레스」에 유학 중이던 신흥우씨가 대신했다. 이승만씨는 1910년3월 대동보 국회 후원으로「독립정신」이란 책을 출판하여 재미동포 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지도했다.
l9l0년이 되자 일본은 한·일 행방을 강행했다.「하와이」와 미주 한인들은 모든 단체가 연합하여「한·일 합방항의서」를 일본 천황에게 발송하고 대한 제국과 조약을 맺은 나라에 합방을 부인하는 결의문을 보냈다.
이때 「하와이」와 미주에 있던 여러 한인 단체는 항일·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교포들의 통합단체인「대한인국민회」와 별도로 미주에 「애국동맹단」,「하와이」에「대동공진단」을 별도로 구성했다.
「대동공진단」이 각 지방 대표자 회의를 열어 한·일 합방 반대를 결의한데 이어 「대한인국민회」「하와이」지방 총회는 별도로 각 지방에 걸쳐 한인 10명에 1명씩 대표를 뽑아 공동대회를 열어 일상 침략을 규탄하고 결의문을 AP통신을 통해 전세계에 알렸다.
한·일 합방 이후 재미한인들간에는 군인 양성 운동도 일어났다.
군인양성의 목적은 사관을 교육시켜 만주에 있는 독립군 편성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청장년 층에 무예 장려>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은「무예장려문」을 배포, 동포들의 무예 정신을 고취하고 「체조요지」란 소책자를 출만하여 청장년 층에 들리는 한편 군대 훈련을 장려했다. 군인훈련은 여러 가지 얘로가 많았으나 그때「하와이」와 미주 이민 중 광무군인이 5백여명 있어서 이들이 교련을 지도했다.
「하와이」의 교련은 처음엔 대동 공진 단이 맡았으나 곧 국민회 안에 연무부를 만들어 전담케 했다. 1914년엔 연무부 사업이 확장되어「하와이」의「아후마누」농장에서 박용만의 노력으로 국민군단이 조직됐다.
그러나「하와이」당국이 훈련은 묵인해주되 무기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목총을 사용했다.
처음 1백3명으로 시작된 국민군단은 3백11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재정 사정이 어려워 2년만에 중단됐다.
19l8년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리자 국민 회는 전체 대표회의를 열고 광복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평화회의에 이승만·민찬호·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했으나 출국 허가를 얻지 못해 평화회의에는 참석치 못하고 때마침「뉴요크」에서 열린 약소국동맹 회에 민찬호씨만 참가했다.
이때부터 상해 임정, 「워싱턴」의 구미위원부 등을 통해 조국 광복운동이 전개됐다. 그때 이승만씨는 임정 대통령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키 위해 공채를 발행했다.
그러나 임정과 이승만씨 간의 부화로 이박사가 l925년 탄핵되자 구미위원부가 폐지됐다.
그후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재미 한인들은 다시 전체의의를 열어 해외한인회의를 열었고 1941년 4월「하와이」의 「호놀룰루」「밀러·스트리트」애서 열린 회의는 광복군지원·대미외교교섭·독립운동자금 모금문제 등을 협의, 해방이 될 때까지 광복운동을 추진 또는 지원했다. <계속>
【하와이=박정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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