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철길(3) -김항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현호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다)
창일이 녀석, 이북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혼자 저러구 계신걸 알면, 여보!
정여사 ………. (현호의 아픈 시선을 감싸주듯 받는다)
현 호 창일이 마음이 어떨까? (마음이 격해진다) 군사분계선 아니라 무슨 장벽이라도 뛰어넘고 달려 올 테지?
정여사 하지만….여보!
현 호 무슨 얘길 하려는 거지?
정여사 (사이, 외면하며) 당신도 여기까지 오시는데 몇 번씩이나 통제 선에 막혀 되돌아가곤 하셨잖아요. 그건…, 그건 어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예요.
현 호 (짧은 한숨) 그럼, (사이, 자신에게 물어보듯) 저 노인들의 행동은 현실이 아닌가? 저분들의 행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한단 말인가?
정여사 (달래듯) 여보!
이때 전화통을 두들기고, 핸들을 돌리고 하다 지친 최덕수가 다시 개스등을 들고 개찰구로 나온다.
최덕수 (현호네를 보고 흠칫 멈춘다) 누구요?
현호, 최덕수를 본다. 그러나 미처 자신의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덕수 (오며) 누구냐니까, 당신들….
현 호 (주춤거린다) 저… 아까부터 여기 있던 사람입니다.
최덕수 (나무라듯) 아니, 그럼 왜 평양행 기차를 타지 않았소? 기차가 떠났잖아!
현 호 저흰, 저….
최덕수 (혀를 찬다) 아, 이젠 북행열차는 세시간 뒤에나 있다구, 그것도 화물열차뿐이지.
현 호 (마음을 가라앉힌다. 최덕수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 저흰…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최덕수 쯧, 쯧, 거 어제 낮에 왔더라면 우리 아들놈이 차장으루 있는 경의선 특별급행을 타구 평양으로 갈 수가 있었을 텐데….
현 호 저, 아저씨….
최덕수 아들녀석 말요? 그 녀석, 조금 있음 평양을 출발할께요. 두시간 반만 지나면 우리 송화역을 통과하지.
현 호 …. (할말이 없다)
정여사 (나직이 한숨 내쉰다. 이들의 대화를 애써 듣지 않으려 한다)
최덕수 하지만 송화역은 너무 작은 역이라 그런 특급열차는 서지를 않는다구. (기분이 우쭐해진다. 회중시계를 꺼내보고) 그런데 그 녀석, 내가 이 역의 역장이라구 저희 동료들한테 자랑을 한 모양이더군.
현 호 그래요.
최덕수 (신이 나는) 그래서 그 기관사들 까지두 송화역을 지날 땐 기차를 조심조심 끌구간단 말씀야, 허허허.
현 호 (엷은 한숨) 그럴 테죠.
최덕수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두어 번 가볍게 두들기며 이러 저리 거닌다. 문득 현호께 다가온다) 그런데 신사 양반!
현 호 네에?
최덕수 난, 이제 나이도 많고 눈도 어두워졌단 말씀야. 그래서 그 뭐, 은…은퇴를 할 생각이야.
현 호 (재빨리) 네, 정말 이젠 쉬실 연세시죠.
최덕수 그래서 그 우리 아들녀석을 우리 송화역의 역장으로 앉힐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시우?
현 호 그, 그게 좋겠군요.
최노인 그 녀석, 아직 나이가 어려서 좀 어떨까 걱정이지만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현 호 아, 그야 물론….
정여사 (가로챈다) 여보, 이젠 들아 가셔야죠.
현 호 그러지. 헌데 아까 그 노인 분들은…?
정여사 걸어서라도 사리원으로 가셨는지도 모르죠.
현 호 (놀란 듯) 뭐라구?
정여사 다른 길루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가세요, 우리도….
최덕수 (당황하여) 아니, 아니라구. 아직 기차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정여사 하지만 아저씨….
최덕수 기다려 보라구요. 좀 기다릴 줄도 알아야하는 법이라오, 사람은….
정여사 …. (난처한 듯 현호를 본다)
현 호 …. (고개 가로젓는다)
최덕수 (중얼대듯) 기다려요, 기다려 보라구요. (휘적거리며 플랫폼 끝으로 나온다. 멀리 철길을 내다본다)
이제 석양이 지고있다.
붉게 타오르는 북쪽하늘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그는 점점 귀에다 신경을 모으기 시작한다.
정여사 (사이) 저 먼저 자동차에 가있겠어요.
현 호 (자기 생각에만 골몰한다) ….
정여사 아이, 여보.
현 호 …? (본다)
정여사 저 먼저 자동차에 가 있겠어요. 빨리 나오세요, 당신.
현 호 알았소.
나가려던 정여사, 잠깐, 두 사람을 돌아다보고 출찰구로 퇴장.
이제 온 신경을 귀와 눈에 집중시킨 채 언제까지고 그렇게 섰는 최덕수.
현호, 견딜 수 없다는 듯 이리저리 플랫폼을 서성거린다.
문득 걸음을 멈추는 현호, 어떤 결단을 내린 듯 최덕수에게 다가간다.
최덕수 (획 고개를 돌려 현호를 본다) 왜 기차가 오지 않지? (두려워진) 왜 아직 기차가 오지 않느냐구.
현 호 (잠깐 망설이다) 저, 아저씨, 그건 ….
팽팽한 줄이 끊어지듯 탁, 긴장을 풀어버리는 최덕수, 개스등을 두어 번 쓸데없이 들어본다.
삐걱거리며 좌우로 흔들리는 등.
최덕수 (변명하듯) 하긴, 일제시댄 형편없었지. 더구나 대동아 전쟁 말기엔 헛, 제 시간에 들어오는 기찬 이상하게 보였다구. 아, 정말 열이면 열 정시에 ….
현 호 (가로채) 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아저씨, (사이, 설득시키려는)오늘은 이제 그만 집에 가셔서 쉬셔야죠.
최덕수 (갑자기) 아, 점등시간이군.
플랫폼에 서 있는 나지막한 등(등) 쪽으로 간다. 호주머니를 열심히 뒤지는 최덕수. 성냥이 없다. 현호가 할 수 없이 성냥을 내민다. 무표정하게 성냥을 나꿔채는 최덕수. 돌아서 버린다. 성냥 긋는다. 현호가 재빨리 등을 가린 유리를 열려하지만 꼼짝 않는다.
최덕수 (손이 뜨거운 듯) 빨리! (타들어 오는 성냥을 던진다. 화가 난) 뭘 하는 거야!
현 호 (짧은 한숨) 열리지 않는군요.
최덕수 무슨 소리야? 또 어느 놈이 여기다 장난을 쳤단 말야?
현 호 아직 불을 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아저씨.
최덕수 뭐라구? 아니, 이 시각이 점등하는 시간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거야?
현 호 (사이) 그것 보다, 아저씨, 이젠 집으로 돌아가 쉬셔야죠, 네에?
최덕수 (펄쩍 뛰듯) 아, 기차가 온다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게야?
현 호 (애가 탄다) 아저씨, 이젠 그만 하시고…. (팔을 잡으려한다)
최덕수 (피하듯) 아. 평양발 특급열차가 지나갈 시간이야. (재빨리 몸을 돌려 플랫폼 끝으로 나와 선다)
이때 최덕수의 귀에 멀리서 증기기관차의 기적이 들린다.
흠칫, 긴장하는 최덕수
현 호 (쫓아온다) 아저씨!
최덕수 아, 뒤로 물러서요. 특급열차는 속력이 빨라 가까이 있음 위험하다구.
현 호 (단호한) 이젠 제발 그만 둬 주세요, 아저씨!
최덕수 (흠칫한다) 뭐라구? 날 보구 은퇼하라구?
현 호 네, 그래요. 이젠 이런…. (다가선다)
최덕수 안돼! (한 손으로 현호를 막는다)
이때 다시 달려오는 기찻소리가 최덕수의 귀를 때린다.
최덕수 (퍼뜩, 긴장하는) 아, 곧 기차가 폼에 들어서겠군. 기차가 온다구, 저리 비켜요.
현 호 (덤비듯) 기차가 아녜요, 여긴 기차가….
듣지않는 최덕수. 오른손의 개스등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차렷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다.
점점 다가오는 기찻소리.
현 호 아저씨, 제발…. (우르르 최덕수를 밀친다)
최덕수 (고함) 비켜! (힘껏, 현호를 뒤로 밀어버린다)
비틀하고, 두어 걸음 비켜서는 현호. 어느 틈에 또 부동의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최덕수.
높은 기적소리가 최덕수의 귀를 파고든다.
현 호 (울먹이듯) 아… 아저…씨… (그러나 차마 최덕수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마악, 눈앞을 지나가는 기차의 요란한 바퀴소리. 높은 기적.
철썩! 익숙한 동작으로 거수경례를 붙이는 최덕수의 곧은 자세. 현호, 눈을 감 듯 외면해 버린다.
최덕수 만족한 표정으로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그대로 경례를 하고 섰다.
플랫폼을 빠져 멀어지는 기찻소리. 순간,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운 듯 소리가 사라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최덕수.
최덕수 (끌리듯 몇 발 따라간다) 창일이…, 창일이 녀석. (놀란) 이 녀석이 보이길 않아!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왜 그 녀석이 보이질 않지? 여봐! (와락 현호를 잡는다) 얘길 해봐. 창일이, 그 녀석이 왜 보이질 않아?
현 호 아저씨, (설득하려드는) 기차는 오지 않는 거예요. 기차는 남으로도 북으로도 오갈 수 가 없단 말입니다.
최덕수 (제 귀를 의심하는) 기차가 오지 않는다구?
현 호 네, 기차는 오지 않습니다. (격해지는) 철길이 끊어진지 이십오년. 이 송화역을 지나다니는 기차는 없단 말입니다.
최덕수 … (천천히 고개 젓는다)
현 호 아저씨, 제 말씀을 들으십시오.
최덕수 (강한 어조) 기차는 와! 어제도 그제도 기차는 이 철길위로 북으로도 남으로도 오가고 있었어!
현 호 (애원하듯) 보세요. 폐허로 변해버린 송화역을 보십시오. 허물어진 저 역사(역사)를 보시란 말입니다. (목이 멘다) 여긴 기찻길이 끊어진지 오랜, 정말 오랜 세월이 흐른 거예요.
최덕수 (격렬하게) 아니야! 기차는 달려. 기차는 쉴새없이 이… (우르르 플랫폼 끝으로 달려와) 이 철길 위를 달리고 있어. 철길이 끊어졌다구? 철길이 끊어지다니. 거짓말! 누가 철길을 끊어 놨다는 거야? 기차는 달려. 평양까지, 부산까지, 신의주까지 기차는, 기차는 달리는 거야!
현 호 (허탈해진다) 아저씨, 그건 아저씨의 환상일 뿐입니다. 이젠 제발….
최덕수 누가 철길을 끊어놨다는거야? 누가 이 길을 오가지 못하게 했느냐구! 내가 기차를 몰테다.
내가 기차를 몰고….
현 호 아저씨! (와락, 최덕수를 껴안는다)
최덕수, 웃으려 한다. 그러나 웃음은 안면 근육만 경직시킬 뿐이다. 이때 역사(역사) 뒤에 와 멎는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두사람 사이렌 소리에 동작을 멈춘다.
최덕수 (사이, 현호의 손을 벗어나며, 곧 태연해진다) 창일이 그녀석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야. 하긴 기차는 차장의 신호없인 움직이지 못한다구.
현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출찰구로 나가려 한다.
이때, 출찰구로 의사가 간호원과 운전수를 데리고 급하게 들어온다. 마주치는 현호. 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이들을 본다.
최덕수 (버럭) 누구야? 왜 개찰도 않고 맘대로 들어와!
이들을 뒤따라 들어오던 정여사, 현호를 보자 멈춰 선다.
최덕수 서라니까, 아직 기차가 올 시간이 멀었어. 대합실에서 기다리라구!
의 사 (다가오며 정중하게) 역장님! 저녁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최덕수 (주춤 물러선다. 둘러서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핀다. 사이) 안돼, 오늘 저녁은 평양에서 오는 급행열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그럴 시간이 없어.
간호원 (부드럽게) 식사가 식어요, 역장님!
의 사 자, 가십시다.
최덕수 (큰) 안 된다니까!
현호가 이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정여사 가만히 막는다.
최덕수 안돼, 돌아가!
의 사 역장님, 또 고집이시군요.
이 순간, 운전수가 최덕수의 등뒤에서 양팔로 힘껏 껴안아버린다.
최덕수 (몹시 놀란) 누구야? 이것 놔. 기차가 온다구! (몸부림친다) 개스등이 저만큼 구르고 모자가 떨어진다.
의 사 갑시다. (돌아서 간다)
현 호 (와락 간호원의 팔을 잡는다) 왜 이러시죠?
간호원 네, 우린 병원에서 왔어요. 저분 우리 병원 오병동 환자예요.
현 호 환자?
간호원 그럼…. (간다)
최덕수 (두발로 허공을 차며) 놔, 이걸 놔. 기차가 온다구, 우리 창일이가, 기차가, 기차, 기차가…. (허우적거리며 의사일행과 함께 퇴장)
최덕수의 발악소리만 들린다.
문득 현호가 그들을 뒤쫓으려 한다.
정여사 (나직이) 병원 앰뷸런스가 저 앞에 와 있어요.
현 호 아, 앰뷸런스, (되뇌듯) 병원?
정여사 …. (고개 끄덕인다)
현 호 …. (할말을 잃는다. 문득 플랫폼에 딩굴고 있는 개스등과 모자를 보자 급히 이것을 집는다)
최덕수 (소리만) 기차가, 기차가 온다니까, 날 놓아줘. 기차, 저 기적소리, 저 기적.
현 호 여보, 이걸…. (개스등과 모자를 내민다)
정여사 저분 한 테요?
현 호 (고개 끄덕인다) 언젠가, 저분에게 필요할 때가 올 거야.
정여사, 잠자코 모자와 개스등을 받아들고 출찰구로 퇴장한다.
이때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일고 자동차 떠나는 소리. 사이렌소리 높아지고.
현호, 망연히 섰다.
주춤 주춤 플랫폼으로 걸어 나온다. 방향감각을 잃은 듯 그렇게, 현호가 서성대는 가운데.
막, 서서히 내린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