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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한국최고의 신라 금관|소박한 관 천년문화의 정화|<글 이종석 기자> <사진 구태봉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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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신라는 유명한 산금의 고장>
경주에서 또 순금의 신라 때 관이 발견됐다. 옛 고분이 무수히 산재하는 경주 시내의 주택가에서 담을 고치다가 금관과 역시 순금의 귀걸이 및 유리관옥·칼 둥 일괄 7점이 출토된 것이다. 그것이 69년 3월 문화재관리국은 최근 이 소식을 탐지하고 유물을 수습한 결과 신라금관 가운데 가장 고식임이 판명됐다.
우리 나라 역사상 금관이 쓰인 시대는 4∼6세기.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삼국시대엔 금이 여간 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관이란 곧 한 부족이나 한나라의 통치자인 왕과 왕비의 상징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니까 1천 5백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왕릉은 이미 허물어져 평지가 되고 그 위에 주택까지 들어섰으며, 다른 부장품들이 거의 삭아 없어졌음에도 금붙이만은 옛 모양 그대로 흙 속에 간수돼 있어서 옛 영화의 자취를 오늘에 새삼 드러낸 것이다.
세계적으로 금장품은 고대 이집트가 유명하나, 동양에서도 일찍부터 금이 쓰였다. 중국에서는 은허에서 조그만 금덩어리나 금박이 보이고,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순금제품이 출토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낙랑고분(우암리 9호고분 모자용 대금구)으로부터 비롯되며 삼국시대에는 관·귀걸이·팔찌·허리띠의 고리·마구, 기타 여러 가지 금제품이 적지 않다.
그 중에도 신라는 유명한 산금의 고장. 그래서 백제나 고구려보다도 훨씬 빛나는 유물을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다.

<곡옥 없고 관대직경이 14㎝>
신라 금관 중 가장 대표전인 것은 경주 박물관에 간수돼 있는 금관총 금관으로 총고 33㎝, 관대 직경19㎝. 1921년 이번 경우와 비슷하게 민가 뜰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인데 그 금판의 꾸밈새는 여간 화려하지 않다. 외관입식의 「출」자형이 정형화한 5층이고 관대에는 현식이 주렁주렁 매달렸으며, 또 뿔 모양의 내관에 촘촘하게 매달린 영격(동그란 금관)이 하른하른 떨어 휘황하기 그지없다.
이 금관총 금관에 비하면 이번 발견된 것은 아주 단순한 형태이다. 삼지창처럼 솟은 입식이 3개. 하트형의 영락을 듬성듬성 달았을 뿐, 흔히 보이는 곡옥 조차 붙인 자국이 없다. 더구나 아리송한 것은 관대의 직경이 14㎝밖에 안되고, 또 그 안쪽에 가축이나 비단을 댄 자국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린 왕이 쓰던 관일까 혹은 머리에 얹어놓는 정도의 관이었을까.

<수지는 원시신앙과 유관성>
금관은 본시 북방 시베리아 계의 문화와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도 부족을 이끄는 통솔자는 그 위엄의 상징으로 머리에 무엇인가 썼을 것이요, 청동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인데 다만 오늘에 전하는 유물이 확연치 않다.
그러나 금관의 장식에 미루어 관식의 전통은 어렴풋이 짐작되고 있다. 머리띠에 새의 깃털·사슴뿔·특수한 나무가지 등을 꽂고 구술을 달았으리 라는 것이다. 금관의 세운 장식이 깃털 모양도 있고, 녹각형·수지형도 있다. 신라금관의 출자형 입식은 수지를 정연하게 도안화한 것인데, 그것은 원시종교의 수목 신앙과 상통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금관은 이같이 우리 나라의 고유신앙과 상당히 관련돼 발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통일신라시대 이후 소멸돼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다만 순금제 이외에 도금의 금동관이 더러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금의 품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시대사상의 변화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려시대의 왕관이 전하는 것은 없지만 그 이후 익선관·면류관의 형태로 바뀌어졌으리라 추정되는 것이다.

<금사로 결합한 정교한 기술>
어쨌든 1천 1백년 전쯤의 신비는 숱한 의문을 간직한 채 볼수록 새롭다. 금관총 금관은 평소에 쓰고 다녔다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장식이 거추장스럽다. 그러면 의식에만 사용됐던 것일까. 또 이번 금관의 경우는 관으로서 쓰는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나 더욱 신비한 점은 제조상의 문제. 옛 금은 오늘날의 그것보다 아무래도 은은해서 확실히 구별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무쇠·청동·은이 다 삭으며, 유리와 옥석마저 풍화되는데 금빛만은 변화가 없다.
옛날의 금은 곧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의 상태. 그것을 종잇장처럼 두드려 펴놓은 모양은 롤러로 압착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리고 실오리같이 금사를 뽑아 결합부를 묶고 영락을 매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공정이요 기술이다.
이런 보배로운 신라문화의 유산이 속출되는 경주는 역시 보배롭고 소중한 땅이다. 지하의 유물 유적도 적은 것이 아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문화재가 경주와 그 일원에 가득 묻혀 있다. 우리가 지금 서두르고 있는 경주개발이 결코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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