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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정인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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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홍원경찰서에 끌려온 지도 석달이 넘고있었다.
밖에는 흰눈이 내리 쌓이고 찬바람이 스며들어 유치장 벽에 몸이 닿으면 아리도록 추웠다. 석달간을 취조했으나 이렇다할 범죄사실을 밝혀내지 못해 주로 자백강요 일변도가 지금까지 계속될 뿐이었다. 유치장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생활에 우리들 모두가 익숙해졌다.
이제는 만사를 체념, 어둠 속에서도 조그마한 낙을 찾으려고 서로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내가 들어있는 감방에서도 김윤경·이희승·이석린·이병기 등이 서로 어느 정도 농담을 주고받게 되었다.
고문을 당하고 들어온 날이면 온몸이 쑤셔 추운 바닥에 드러누워 끙끙 앓았지만 고문을 당하지 않은 날에는 그런대로 우스개 소리가 오고갔다.
간수들도 이제는 서로 친해지게 되어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아도 못 본체 했다. 또한 우리들의 우스개 소리에 끼어 들어 웃기까지 했다.
간수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로 처음에는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 감시의 눈에 불을 밝혔으나 이제는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한편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
김윤경 이희승 이석린 이병기와 나 다섯은 감방의 세 가지 기쁜 소리라는 것을 지어냈다.
우리는 그것을 삼희성이라고 이름했다.
첫째는 하루 세 때마다 들리는 『밥이요』라는 소리.
둘째는 취침이라는 소리.
세 째는 『우편이요』라는 소리였다.
이 세 가지 기쁜 소리는 우리의 하루에 자그마한 낙이었다.
감방에서 우리는 하루 온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형의 확정을 받은 감옥이 아니라 취조중인 유치장이기 때문인지 절대로 편안히 앉아있게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려니 발에 쥐가 나서 쩔쩔 매어 간수들의 회초리 세례를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과 인체는 적응이라는 묘한 순리를 가지고있는 모양.
습관이 되니 무릎 꿇고 앉아있는 것도 나중에는 편안하게 되었다.
아직 이러한 숙달이 안 되었을 때 이 세 가지 기쁜 소리는 우선 무릎꿇고 앉아있는 고통을 덜게 하는 것으로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기쁜 소리 중 한가지라도 들리면 우선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이 기쁨을 받아 들였다.
어찌 그리 민첩한지 이 세 가지 소리의 첫 자음만 들려도 벌써 몸이 벌떡 움직이게 되었다.
우편은 가족과 친지에게도 그래도 제법 왔다. 봉서는 안되고 엽서만이 통용되었는데 엽서가 오면 검열을 하고 끌어내다가 온 엽서를 보여주고 다시 데려다 가두었다.
감방생활은 나이를 초월하여 어린아이를 만드는 듯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책밖에 모르는 학자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무료한 고통을 참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어리숙하고 순진한 성격이 더욱 무디고 순박해져서 바깥세상에서는 이리 우습지도 않은 일에 껄껄거리고 웃으며 실없는 장난으로 하루하루를 달랬다.
그때 내 나이 47세. 이희승은 나와 동갑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였으며 이극로는 48세, 최현배는 50세로 연희전문학교교수, 장지영은57세, 이증화는 63세, 김양수는48세 등으로 모두 중년을 넘어섰는데도 감방 안 친구들은 어린애처럼 장난을 했다. 우리 감방에 세끼 밥을 날라다 주는 사람에게 용덕이란 18세난 딸이 있었다.
간혹 이 용덕이가 아버지대신 밥을 날라다 주었는데 우리들은 이 소녀의 손금을 번갈아 보아주면서 어려운 심부름을 시켰다.
이 소녀는 손금보는 재미에 자주 찾아와 우리들 시중을 들었는데 주로 각자 집에서 보내준 용돈으로 과자 등 먹을 것을 사오게 하는 것이었다.
각자 앞으로 온 용돈은 감방장이 맡아놓고 그 액수를 통고만 해주었다.
우리 동지들은 이 소녀를 시켜「나마까시」등 과자를 그 용돈에서 사오게 하여 나누어 먹었다.
김윤경 등 감방동지들은 서로 상대방을 『손금 잘 본다』고 추켜세워 놓고 다른 간수들에게서 환히 들어 알고 있는 용덕이네 집안사정을 손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알아맞혀 나가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하며 틈만 있으면 우리를 찾아와 손을 내밀며 손금을 보아달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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