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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 체제」는 확고한가|중공의 권력 구조와 후속자 지목의 언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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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택동-주은래 체제」내지「실질적인 주은래 천하」로 생각되던 중공의 권력 구조가 최근 들어 그 안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지낸 8일 주은래가 아직 40대인 요문원 장춘교의 이름을 후계자 문제와 관련해서 거론 한데 이어 13일에는 「체코」 공산당 기관지 「루도·프라보」가 새로운 권력 투쟁설을 보도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제2차 문화대혁명 혹은 주은래 실권의 징조라고 성급한 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표 실각 이후 소위 주은래 「그룹」이 보여준 실력이 명백한 증거로 있는 만큼 이와 같은 풀이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주의 발언과 「루드·프라보」의 보도는 중국공산당이 모의 후계자를 선정할 때 해결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생각된다.
즉 창당 시대의 인물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는 현 지도층의 세대 교체시기에 대해 주는 자기 다음에야 이뤄질 것이라고 비친데 반해 「루드·프라보」 지는 모의 생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는 얘기이다.
주의 발언 내용은 모의 사후 집사 지도 체제가 실현되고 요·장 등「유능한 젊은이들은 그 다음에 맡을 것이란 뜻으로 집약된다. 집단지도체제가 주 자신을 정점으로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루드· 프라보」지는 새로운 당권 투쟁이 「적어도 둘 이상의 파벌 사이에」 진행 중이며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현재 활약 중인 사람은 (모·주)둘 뿐』이라고 보도했다. 최고 실력자가 「둘뿐」인데 당권 투쟁이 「둘 이상」사이에 진행 중이란 말은 모가 주의의 누군가를 싸고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중공의 지도설 내부에 만약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노선의 차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대 교체의 시기를 둘러싼 것임이 분명해진다.
모택동은 이미 65년에 「지도자의 세대 교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고신」을 얘기한 적이 있다. 모는 당시 「프랑스」 문화상의 자격으로 북경을 방문했던「앙드레·말로」에게 「혁명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던 세대」 와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곱게 다듬어 낸 세대」 간의 정신적 차이를 매우 우려하는 듯이 말했다.
사실 현재 중공 권력의 핵심 부분인 당 중앙정치국을 보면 요·장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정강산 투쟁 시절(27년∼34년) 이래의 고삼· 고령 당원들뿐이다. 요·장 두 사람도 65년 이후 갑자기 나타난 셈이므로 그 이전에는 세대 교체 문제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장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구전 대회에서 선출된 2백70명의 중앙위원 및 동 후보 위원 가운데 50대 이하의 인사가 70명 정도 끼여 있는 것으로 추산되나 군 출신을 빼고 나면 순수 당료는 5명도 채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이 자기 생전에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려고 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모가 이미 이 작업에 나섰을지도 모른다는 몇 가지 증거도 있다.
첫째, 주은래 체제가 보여준 「유연성」이 모택동 사상의 행정에까지 육박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난 1월28일자 인민 일보 사설은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것은 유물 변증법에 대한 반역이며』 『모택동 사상을 절대화하는 것 자체가 반 모택동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물변증법의 진리관을 재확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문혁 이후 『제국주의가 전면적 붕괴를 향하고 있는 시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규약) 라고 떠받들어 오던 모 사상을 「필요하면 수정할 수도 있는 사상」으로 격하 한 것이었다. 주체 제가 출범한 지 불과 5개월만에 이러한 논문이 공공연히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보나 그의 광신적 숭배자들이 기분 좋게 여길 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경제 정책이 자력 갱생의 기본 정신을 의심하게 될 만큼 과감한 문호개방형으로 기운 것은 반모 사상의 양적 축적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유소기의 제거가 이와 같은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를 일으킬까 봐 취해졌다면 주라고 해서 (그런 혐의를 받을 경우) 안전하다는 법은 없다.
둘째, 주가 후계자 선정처럼 중대한 문제를 공개 석상에서, 그것도 이름까지 짚어 가면서 거론한 게 이상스럽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모택동도 지금까지 자신의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두 번 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58년「몽고메리」 원수에게 사적으로 유소기의 이름을 댄 것과 64년『「후루시초프」의 사이비 공산주의와 우리들의 교훈』이라는 논문에서 지도자의 자격 요건 5가지를 열거한 것이 전부인 것이다.
따라서 주의 이번 실언은 지도층의 세대 교체 문제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갈등이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언뜻 나타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리 지나가는 말이라도 주가 모의 의중과 관계없이 특정인을 「후계자 감」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모택동이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전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세대 교체까지 정해서 하고 싶어하며 「신세대의 기수」로서는 문예 평론가 출신인 장·요 두 사람을 지목했던 게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 모가 하필 문예 평론가 출신을 염두에 둘리가 있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는 문예 비평가를 가리켜 『올바른 정치적 기준의 소유자』 (42·연안 문예 강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문화란 그 사회의 정치·경제의 반영이지만 일단 형성된 문화는 정치·경제 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40·신민주주의론) 고 강조, 문예 비평가의 자격이나 기능을 독특하게 정의해 왔다.
만약 모가 현 단계의 중공 사회를 제도적 사회주의 개조가 대체로 완결된 상태라고 판단한 경우, 그리고 다음 단계의 지도자 임무가 사회주의적 논리 관의 확립 내지 「신문화」의 구축에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모 사상으로 무장한 문예 비평가 출신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70년8월 2중전회 이후 열리지 않고 있는 당 중앙위 전체 회의가 소집되거나 제4기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가 예고된다면 이 문제에 대한 결판이 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홍사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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