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제자 이지택>|<제28화>북간도(1)|이지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지택씨는 1898년 평남 강서군 태생, 올해 74세. 1910년에 용 정에 이주, 명동과 영신에서 공부했으며 3·l운동과 6·10만세사건에 앞장섰다.
왜경에 쫓겨 연해주에 망명, 상해에서 해방을 맞았다. 초대수련회장을 지냈다.<편집자주>

<영유권 분쟁>
북간도는 조상의 피와 땀이 배고 무명의 별들이 조국을 외치며 쓰러진 민족독립운동의 기지였다.
내가 겪은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한-청 두 나라에 얽힌 간도문제부터 간단히 말해야겠다.
숙종 38년(1712년)에 청의 총관 목극등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문에는 최근 부산대학서 발견되었다는 여 지도에서 지적된 것과 같이「변지차심시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라 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른바 간도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우리측은「동위토문」은 도문강의 뜻이며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고 청 국은 두만강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분쟁은 정계비이후 줄곧 논란돼왔고 여러 차례 회담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양국이 맞서기는 갑신정변(l884년) 다음해인 이른바 을유감계 회담과 정해감계 회담이었다.
안변부사로 있던 이중하가 1885년 9월에 감계사로 임명되어 토문강을 답사했고 이어 27일부터 종사관 조창식을 데리고 청나라 대표 덕 옥·가원계 등과 회령에서 담판했었다.
여기서 이중하는 도문강이 국경이라는 것을 지세·산수로써 설파하고 청 국이 도 문을 두만으로 혼동하고 있음을 밝혔다. 실제로 토문강을 답사해 보자고 나섰다.
청 측도 도문강이 국경이라고 했으나 청 국의 고문서와 총리아문의 주의로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 하고, 또는 당초 도문강에 있던 정계비를 한인들이 백두산에 옮겨 세운 뒤 떼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열린 정해 회담에서 다시 이중하는 청 국 대표를 만났으나 진척이 없었고 이듬해 봄에 만나서는 양국대표가 회령에서 만나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서두 수를 살피고 홍단 수를 돌아보며 국경을 실측했다.
이때 청국 대표는『이쯤에서 국경을 삼자』면서 호위병으로 하여금 이중하를 협박했다.
이중하는 이에 단호히 맞서『우리국경을 줄이다니 말이 되는가. 내 머리가 여기서 떨어져도 그것은 안 된다』고 소리쳤다. 결국 청인은 수그러졌으나 그때 그들은 15개의 국경표지비석을 만들어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 뒤 여러 곡절 끝에 결국 국경회담은 깨졌다.
이 사이 청 국은 국자가에 초간국(간무국)을 두어 개간을 촉진하는 한편, 우리 이주민들에게 이른바 역복치발을 강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청나라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따라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보호하고 이를 거부하면 밭을 빼앗고 미개간지로 보내는 것이었다.
이러다가 1900년에 북 청 사변이 일어나「러시아」가 출병, 간도를 점령하게 되었다. 평소 청인의 압박을 받아오던 간도 한인들이 호 복을 벗고「러시아」군에 붙어서 청인의 가렴주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등 혼란이 빚어지게 되었다.
그 동 안 간도 한인들은 여러 번 역복치발의 압제에서 보호해주도록 한국정부에 호소하고 있었는데「러시아」출병 등으로 사태가 혼돈 되자 한국정부는 비로소 1902년에 이범윤을 시찰 원으로 간도에 보낸 것이다.
이범윤은 6월 무더위 속에 말을 타고 함북 종성에서 간도로 들어갔다. 그의 임무는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위문하며 80이상의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공자를 찾아 정부에 포상상신 하는 것 등으로 이탈 한인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범윤이 눈에 뜨인 것은 청인들의 학대에 신음하는 동포들의 모습이었다. 헐벗고 굶주리고, 피나는 노력은 청인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초 임무대로 동포들을 위문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범윤은 당초의 호구조사의 임무는 잊고 고통받는 동포를 구하는 길은 힘(병력)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전 북간도를 돌기로 했으나 호위병과 청 국 공사의 증명서 없이는 다닐 수가 없어서 이 신변안전을 청 국 정부에 신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 국은 호위병 대동을 끝내 허가하지 않았다. 이범윤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1903년에 서울의 의정부참정 김규홍은 이 같은 사정을 종합한 보고서를 만들어 고종에게 상주했다.
『북간도는 한-청의 교계지역인고로 황무지로 남아있기 수백 년이 되어 변 민들이 이루 경식 하는 자 수만 호에 이르는바 청인의 박해함이 심하다. 생각 컨 대 분수령정계비이하 토문강 이남의 구역은 분명히 우리 땅 인즉 마땅히 장 량의 제도를 본받아 세율을 정하고 개간을 권장하여야하며 보호 관을 상주케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검토한 정부는 시찰 원으로 다녀온 이범윤을 북 변 간도관리 사로 임명했고 외부(외무부)는 1903년 7월13일자로 이를 청 국 공사 허태신에게 통고한 것이었다.
이처럼 간도를 싸고 2백년이상이나 영토권을 주장, 대등한 교섭을 벌여온 한국이 이땅을 뺏긴 것은 이범윤이 관리사로 간 2년뒤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정부가 외교권을 뺏긴 때문이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1909년(청의 선 통 l년)에『간도에 관한 일-청 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 국의 영토로 주어버린 것이었다.
즉 그 협약 1조에는『간도에 대하여 일본은 청 국의 영토권을 승인함과 동시에 청 국은 일본에 일-한 양국인 보호 권과 길림∼회령철도 부설권을 승인키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 협약에서 일본은 청의 영토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장차 만주와 중국대륙을 삼킬 계획아래 전략철도의 부설권을「바터」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 나라는 간도를 잃은 것이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