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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의 국가통일과 국민 통합|『한국인의 재발견』위한「세미나」「크리스천·아카데미」주최|이기백 교수 강연내용 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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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크리스천·아카데미」는 지난29·30일「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한국인의 단일 민족의식」을 주제로 한「세미나」를 가졌다.「한국인의 재발견」을 위한 광범한 토론 과정에서 열린 이 모임에서「민족형성과 단일 민족의식」(이광규·서울대 사대·인류학) 「한국사상의 국가 통일과 국민 통합」(이기백·서강대·국사)「이데올로기와 민족의식」(김창순·고려대 아연) 등의 주제가 발표됐다.
이 모임에선 특히 이광규 교수가『민족의 동질성이 민족통일에 바탕이 되고 가능성을 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 정치학자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민족의 동질성은 절대로 통일의 힘이 되기는커녕 곤란을 낳는 것이고 오히려 이념이나 외적조건 등의 작용이 통일을 좌우한다는 주장도 컸다.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 이러한 논의는 차치하고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에 있어서의 국가통일과 국민통합의 문제를 논해 주목되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삼국통일은 신라가 이룩한 통일이라지만 고구려의 영토는 포함되지 않았고 그 유민은 발해를 건설했다. 그 발해는 우리 민족사에서 제외되기 일쑤였기 대문에 유득공은「발해고」로 남북국의 개념을 내세웠었다.
당연히 이런 역사관을 가져야 하겠지만 사료 부족이란 문제와 함께 민족 전체의 광범한 자료를 다루기 어려운 이유 때문에 이를 피하고 신라 내부의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전체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면 삼국대립과 이들의 투쟁, 그리고 통일과정에 나타나는 특징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전체적으로 이들의 대립은 정치를 주도한 삼국 귀족의 대립이 기본 특징이다. 신라에는 골품이란 신분제가 있었으며 진골이 정치·문화·군사 등을 주도했다. 삼국사이에는「백제」또는「국지수」등의 표현에 나와있는 것처럼 적대감정이 극도에 달해있었다.
이것은 당시가 일종 전국시대·정복 국가적 성격을 가진 시대임을 입증한다.
때문에 삼국통일은 정복 전쟁을 통한 통일로 규정할 수 있다. 상류 귀족은 무신 귀족이었고 중간 귀족이하 일반인은 불만이 컸다.「세속오계」를 가르친 원광법사도 실은 중간 귀족의 신분적 불만을 신앙으로 극복하려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왕권시대에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선 오히려 위화감보다는 일체감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대에 지켜지던 세속오계에서도 신이 가장 중시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람을 횡으로 연결짓는 믿음이 위로 충이 되었다. 이때 충은 임금 개인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을 뜻한 것이었다.
또 중앙의 귀족이나 지방 촌락의 노비도 용을 보였다. 사다함의 죽음, 임신서기석의 글, 죽지낭 설화가 모두 이 믿음과 충성과 용기를 얘기하고 있다. 이처럼 계급사회에서도 놀랍게 공동체적 관념은 강했다.
이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인가? 신라 불교는 귀족의 것이었고 평민에겐 역시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통일 뒤엔 일체감이 깨졌다. 신문왕은 전제를 강화, 화백 구성원을 숙청하고 집사부란 관료적 행정권을 강화함으로써 귀족들과도 위화감을 조성했으며 민중에게도 지나친 부담으로 불교의 내세 신앙·정토 신앙이 커졌다.
후삼국의 성립은 고구마·백제 유민의 신라에 대한 불만, 진을 귀족층의 개별 세력성장에 따른 불 융화, 지방 호족의 성장, 농민 반란의 확대 등에 기인했다. 왕건이 이들을 통일한 것도 호족을 달래 이들과 손을 잡고 유민들이나 농민들을 무마한 인심 수습에서 가능했다.
따라서 고려의 통일은 무력통일이기보다 정치적 통일이었다. 고려는 조세를 경감하고 노력을 줄였으며 노비도 국고로 사서 풀어주는 선정으로 통일을 다질 수 있었다.
호족의 반발을 일반 국민의 지지로 막을 줄 아는 정치였다. 집권층을 중심으로 한 통일이었지만 일반국민의 작용도 컸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려에서 진정한 의미의 국민 단합이 이뤄졌다고 보이진 않는다.
고려는 불자 신앙으로 복을 받는다는 현세적 타산에서 팔관회 등 의식이 성했으며 이 에서 일체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외면적인 것이지 기본적으로는 역시 일체감은 없었다.
조선에선 유교를 통한 향약 등으로 민중을 설득했으나 이 역시 기본적으로 지배층이 중심이 된 것이기 때문에 국민 통합이라곤 할 수 없다.
결국 조선말 독립협회가 서고 삼·일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국민 통합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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