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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윤석오 제자|<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8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편집자주>외국인은 이 박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다음 글은 이 박사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미국인 「글렌」씨의 기고다.
필자 「윌리엄·글렌」(William A·Glenn) 씨는 53년부터 「4·19」때까지 7년간 이 박사를 대외문서 작성에서 도왔고, 그 후 자유 중국에 건너가 지금은 대만 정부의 신문 국에서 일하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고·유니언」신문사 편집국장과 남가주대 신문학 교수를 역임한 「글렌」씨는 53년9월 당시 양유찬 주미 대사의 소개로 이 박사 곁에서 일하게 됐다. 「글렌」씨는 연봉 3천 달러로 대통령실과 외무부·공보처 등의 대외 문서를 기초하는 일 외에도 영자지 「코리언·리퍼블릭」(「헤럴드」의 전신)의 제작을 도왔고 매일 사설을 집필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글렌」씨는 변 형태 외무부 장관이 성안한 대외 성명 문을 대폭 수정해서 변 장관과 말다툼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글렌」씨의 영문 기고는 이규현 해외 공보관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진해 하계 별장>
진해의 봄은 아름답다. 그곳의 벚꽃은 서울보다 더 붉고 오래 핀다. 54년까지만 해도 진해는 조그마하고 조용한 곳이었으나 세계 어떤 항구와도 비길만한 아름다운 항구였다.
그러나 진해가 나의 인상에 깊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이승만 박사의 여름 별장 때문이다. 이 박사는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이곳 해군장교의 부인 가운데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분이 있었다. 이 박사는 때때로 우리와 함께 누가 매운 김치를 가장 잘 먹을 수 있는지 내기를 하기도 했다. 모두들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먹는 척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휴전에 합의하곤 박장대소를 한 적도 있다.
외국 특파원들은 이곳을 『하계 별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말이 별장이지 낡은 해군 통제부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경무대도 「맨션」이라 불렀지만 실상 그렇지 않았다.
이 박사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소박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인지 호화로운 환경에서는 편안한 기분을 갖지 못했다.
5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백악관 건너편에 있는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에 투숙한 이 박사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냉방 시설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새벽4시에 일어나 「블레어·하우스」로 이 박사를 찾아갔다. 그때 「워싱턴」의 날씨는 그 시간에도 몹시 더웠다. 그런데도 이 박사는 냉방기를 꺼놓고 있었다.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워싱턴」에 도착한 후 미국의회에서 행한 연설에 대해 미국 언론이 비평 자세를 취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 이 박사 주위 사람들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을 그에게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행하게 될 다음 연설에서는 부드러운 어조를 택할 생각을 하게됐고 결국 그렇게 했다.
진해 별장은 평범한 가옥이었을 뿐 아니라 방도 두·세개 밖에 없었다. 비서 진들은 일할 수 있는 방이 없어 고충이 심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곳을 더 이상 편안해 할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 별장은 썩 마음에 들었으며 주위 배경은 마치 한국의 옛날 얘기에 나오는 것과 같았다.
항구로부터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별장 못 미처에서 길은 끝나고 사잇길을 따라 집까지 걸어야 한다. 마당엔 자연스러운 정원이었고, 그 정원 끝에 가 서면 푸른 바다가 눈 아래 펼쳐진다.
경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박사는 이곳에서도 가능한 한 정원에 나와 집무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머리는 많은 지식으로 채워졌으나 그의 가슴은 아직도 흙 속의 인간으로 남아있었다.
별장 아래 가파른 언덕 아래로 나있는 좁은 사잇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물이 출렁이는 방파제가 있다. 이곳에서 이 박사는 낚시를 즐겼다.
그가 낚시를 할때는 혼자가 보통이었지만 어떤 때는 옛 친구와 함께 할때도 있었다. 낚시의 점잖은 묘미를 모르는 사람과는 함께 낚시하는 것을 싫어했다.
5월인가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쌀쌀한 맛도 있었으나 비교적 따뜻한 날씨에, 바다는 푸르고 잔잔했다. 우리는 모두 낚싯배를 타기 위해 벼랑의 사잇길을 따라 내려갔다.
때마침 이 때는 「콜터」장군과 몇 사람의 손님이 와 있었다. 이 박사는 이날도 혼자 낚시를 즐기고 싶었으나 예의상 말은 꺼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때때로 다른 정치인에게 써먹던 따돌리기 작전을 강행했다. 일행이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늙은 사공만 태우고 바다 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갔다. 몸소 노를 저어서.
물에 떨어진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어깨만 움찔했을 뿐 남은 배를 타고 그를 좇아가지는 않았다.
훌륭한 조사는 말이 없다. 이 박사도 그랬다. 그리고 우리를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물고기도 자신을 이해 해주는 낚시꾼에게 물리는 것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것을 실증이나 하듯이 이 박사는 이날 여러 마리를 잡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낚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단 한 마리밖에 못 잡는 날이 많았다. 그것도 너무나 작아서 이 박사는 그렇게 작은 입으로 어떻게 낚시바늘을 물었을까하고 놀리기도 했었다. <계속> 【월리엄·글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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