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한 음질 북한의 언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 적십자 제1차 본 회담은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뜨거운 감격과 함께 분단 4반세기의 민족적 비감을 같이 안겨 주었다. 민족이 문화공동체라고 한다면, 이는 의사소통이 자유로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의 매개체로서 언어의 동일성이 중요시된다. 북한은 오랜 분단상태를 지속하는 사이에 「이데올로기」·정치·경제·사회·문학의 체제를 달리함으로써 일부 언어가 변질돼 가고 있다. 모든 이해의 기초가 되는 이 언어의 장벽에 대해 홍연숙 교수(한양대·언어학)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홍연숙 교수에게 듣는다|같은 말의 다른 뜻>
나와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녀 할아버지 할머니 등을 통칭하며 가장 중요한 생활 단위가 되는 「가족」을 정치적 용어화했다. 북에서 말하는 「가족주의」는 몇몇 사람들끼리 정실관계를 맺고 조직에 앞서 자기들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비조직적이고 비원칙적인 사장의 동향과 행동을 말한다. 「가족」이란 말은 이처럼 나쁜 뜻에 쓰이는 어휘가 되었다. 「아가씨」란 말도 그렇다. 안내양을 「아가씨」라고 부르자 화를 내면서 「접대원」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남북적 예비회담 때부터 남한기자들은 들었다. 「부르좌」적인 용어라고 싫어한다.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도 북한 여성들에겐 「터부」로 되었다. 당성이 강하다는 뜻의 「열성이다」 또는 「똑똑하다」는 말을 들어야 「아가씨」들도 좋아한다.
이번 회담 대표들은 평양의 소년「궁전」에서 「학습하는」 소년들을 보았다. 「궁전」의 뜻은 사회적 사명을 띤 훌륭한 건축물이다. 문화「궁전」, 아동「궁전」도 있다. 학습은 공부를 뜻한다. 이처럼 용어의 형태는 같으면서도 그 뜻이 전혀 달라졌을 때 우리는 언어의 장벽을 가장 절실히 느낀다. 차라리 신조어나 외래어는 겉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뜻의 차이를 짐작은 할 수 있다.

<신조어>
평양 시가에서 우리 대표들은 「종합편의」라는 생소한 간판을 보았으며 「위생실」이란 낱말을 몰라 불편을 겪었다.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면서도 전혀 생소하고 어떤 것은 외국어를 대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종합편의=식당·이발소·양복점·잡화상 등 「서비스」업체를 한 군데 모아 놓은 것으로 영어의 「서비스·센터」에 해당된다. ▲위생실=화장실 ▲가죽 이김 공장=피혁공장 ▲겉곡식=피곡 ▲꼼바르다=마음이 좀스럽고 야멸지다 ▲공훈 배우=배우의 급수인데 「인민 배우」 다음가는 명예칭호 ▲곽밥=도시락 ▲기본고리=전체를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 ▲기상수문국=관상대 ▲나비내기=누에씨를 받기 위해 종자고치에서 나비를 나오게 하는 일 ▲남새=채소 ▲내오다=마련하다 ▲냉동고=냉장고 ▲놀다=역할을 한다 ▲녹거리=싼 물건, 싼 거리 ▲다랑논=다랑이로 된 논 ▲다그치다=재촉하여 내몰다 ▲닭 공장=양계장 ▲떨쳐나서다=일어나 앞서다 ▲두리에=둘레에, 주변에 ▲마스다=사용하지 못하게 부수거나 망가뜨리다 ▲매고리=중심 ▲복쑤=앙갚음하려는 생각, 복수와 복수는 구별 표기한다 ▲비날론=「나일론」의 일종 ▲의피=인조가죽 ▲비라리=구구한 말로 남에게 무엇을 청하는 것 ▲사양공=가축의 사양을 맡은 노동자 ▲양생원=양로원 ▲어제날=지난날 ▲엎어마리=냉면의 곱배기, 지조 없는 여자 ▲옥쌀=옥수수 숫가루 ▲원쑤=원수, 원수는 원수로 구별하여 표기한다 ▲일본새=일하는 본보기 ▲쪽잠=잠깐 자는 잠 ▲찍다=정하다 ▲직일=일직 ▲추리=자두 ▲행표=수표 등 새로운 말들이 많이 있으며 이 가운데는 전혀 새로운 것도 있지만 옛말을 찾아낸 것도 있다. 새로 생긴 이 같은 말들은 대체로 크게 4개의 범주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고어에서 온 말=고유어가 없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고어로 고쳤다. ▲수화물을 「수학몬」이라고 하는데 「몬」은 물건의 고어다. ▲분비몬=분비물 ▲여=암초 ▲본새=본보기 ▲호상=상호 ▲직일=일직 ▲내왕=왕내 등도 같다.
둘째, 사투리에서 온 말=『강냉이 「가을」에 「떨쳐나섰다」』, 『수령님이 「지펴주신」 새 기계를 가지고 「자랑찬」 승리의 길로 「일 떠나라」』 등에서 「」속의 용어는 대부분 평안도 사투리를 표준화한 것이다. 서울말이 표준어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평안도 출신의 상층부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평안도 사투리는 표준어로 많이 침투되고 있고 함경도 사투리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두리=둘레의 평안방언 ▲무스다=짓찧어서 부수다의 함경도 방언 등이 그 예다.
세째, 시대성을 띤 신생어=공민증, 공훈배우, 20호(풍를 가리키는 말=내각훈령 20호로 이 잡기를 벌였기 때문), 천리마 운동, 사화운동(농업의 기계화, 전기화, 수리화, 화학화로 현대화를 이룩하자는 운동) 등이 있으며 이번에 우리 대표단이 들렀던 초대소(여관·대기소)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복합동사가 있다. 「교육 교양 하다」, 「확대 풍부화 시키다」, 「짓부숴버리다」 등이다.

<외래어>
노어계통이 대부분이다. 영어도 쓰긴 하나 발음을 노어식으로 표기한다. ▲꼬미시야= 「커미티」(위원회) ▲깜빠니야=「캠페인」 ▲꼼비나트=종합공장 ▲꼼무나=공동집단 ▲뜨락또르=「트랙터」 ▲삐오네르=소년단 ▲테제=주제 등 어려운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가 하면 「모서리볼」(코너·킥), 「중앙으로 꺾어 차기」(센터링) 등의 말처럼 억지로 고쳐 쓰기도 한다.
첫소리 「ㄹ」과 「ㄴ」의 사용
「알타이」계인 우리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법으로 초성이 아닐 때 발음되는 「ㄹ」이나 「ㄴ」을 그들은 초성에서도 그대로 적고 소리낸다. 「리해」, 「리순신 장군」, 「력사」 「량심」, 「녀성」, 「뉴대 강화」, 「녕변 진달래」 등과 「로동」, 「롱구시합」, 「론설위원」 「롱담」 등으로 사용한다.

<북한언어의 변화경향>
북한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표현이 번창하고 남한에서 같으면 욕설에나 쓸 표현이고 예의에 어긋난 말을 교과서에서도 태연히 쓰고 있다. 정치적인 논설문이나 신문사설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이나 교육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면 교과의 제목에서 『원쑤를 족치는 기세로』, 『돈벌이에 미친놈들』, 『불후의 고전적 명작 「피바다」 공연』, 『미제의 각을 뜨자』(껍질을 벗긴다는 뜻) 등이 보이며 여성잡지에 『한 날강도의 발자취』, 『놈들이 개떼처럼 덤벼들었다』 등이 있다.
이런 끔찍한 어휘를 구태여 사용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예가 많다. 이는 북의 언어가 비방하는 언어와 정치적인 언어로서 그 용도와 범위가 커지고 또 그러한 방면으로 특수한 발전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언어가 달라져서 두 개의 외국어처럼 되기 전에 남북의 언어체제를 같이 논의하는 모임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여기서 더욱 절실히 느낀다. 의사소통의 매개체인 언어의 동일성이 무너질 때 고유민족으로서의 민족성의 통일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다같이 명심해야 할 심각한 문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