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양 전화선에「평양 발」러시 90시간|한적 프레스·센터「남북대화」취재 안팎|새벽5시 기상문의부터 시작…철야근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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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기는 평양, 우리는 서울로 떠난다.』
「평양 발」남북대화를 홍수처럼 쏟아놓던 서울∼평양간 직통전화는 2일 아침9시한적 일행의 출발 소식을 끝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분단4반세기만에 틘 또 하나의 남북왕래는, 그러나 10일 뒤의 재개(서울회담)를 기약하면서 잠시 침묵에 들어갔을 뿐이다.
『뿡-.』흡사 뱃고동 소리 같은 수신음과 합께 빨간 신호등을 번쩍이며 남북직통전화가 처음·울린 것은 29일 하오2시51분.『야! 들어왔다』대표단일행이 북을 향해 떠난 뒤 초조하게 제1신을 기다리던 1백여 내의보도진은 벌떼처럼 수화기에 몰렸다.
그때『여기는 평양, 우리대표단 안착』이라는 숨가쁜 1성이 귓전을 때렸다.
뒤이어 판문점∼평양간 연도, 평양거리, 숙소 등의「스케치」기사가 둑 터진 강물처럼 쏟아졌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사무국에 대기했던 기자들은 촉각을 다퉈 본사직통전화를 돌렸다. 이때부터 각 사「데스크」와 한적「프레스·센터」는 24시간 철야근무에 들어갔다.
27년만에 처음 통한 서울∼평양간 2개의 전화통은 불꽃을 퉁기듯 했다. 상오7시 첫 기사를「스타트」로 상오9시, 하오1시, 하오4시, 밤1시까지 신문마감 시간을 따라 쉴새없이 호출이 오갔다. 공식「스케즐」로 문수리 숙소를 비올 때만 잠시 끊겼을 뿐 그야말로 24시간 줄곧 쉴 사이가 없었다.
『평양특파원은 잠도 자지 않느냐?』는 농담이 날아갈 정도였다. 한적「프레스·센터」에서도 신문·통신·방송 25개 사가 하루5명씩 당번제로 조를 짜 24시간을「커버」한 것은 물론이다.
기사는 엄격한「풀」. 아무리 기자 라지만 특종의식은 사라질 수 없도록 돼있다. 각 사마다 전화가 트인 지난5일간「도둑전화」방지에 신경들을 곤두세웠다.
특히 30일자 몇몇 신문에 출처불명의「스케치」가 두어 토막씩 실리자, 신경전은 더욱 가열-. 같은 사 끼리 통화를 한 눈치가 보이면 내용을 꼬치꼬치 밝히는 등 신경과민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31일하오 마감시간이 임박해서 모 신문에서 업무연락을 하다말고 갑자기 「메모」를 보내오자 경쟁 지에선 기습을 당하는 줄 알고 잠시 흥분하기도-.
사정은 평양서도 마찬가지. 아예 단장 방인 3호 동 숙소 5호실에 전화통을 갖다놓고 「풀」기자 외엔 손도 못 대게 철저히 감시를 했다.
이 때문에「풀」기자는 전화통에 매달리느라 점심을 굶는 일이 일쑤였다.
만경대 오찬 때「스케치」당번이었던 J신문 L특파원은「파티」에도 참석 못한 채 홀로 숙소로 뛰어 송고 하느라고 점심을 굶었으며 소년궁전참관 때도 공연구경을 잡쳤다고 전했다.
직통 전화는 또한 보도업무 뿐만 아니라 새벽5시 그쪽 평양의 기상문의부터 시작했다.
『여보세요. 교환 양, 그쪽 날씨는 어떻습니까?』
서울기자들과 평양 교환 양간에 날씨 문의를 주고 받아왔다.
처음 평양 교환 양들은 묻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해줄 뿐 친절히 알려주거나,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감사합니다』는 교환 양들의 고운 목소리에 젖어온 이쪽으로선 아무래도 막막해 보였다.
그러나 며칠 새에 태도는 1백80도로 달라졌다.『기자선생님이십니까……안녕히 계십시오』등 인사를 잊지 않을 뿐 아니라 특파원들과 연락이 안돼 애를 태우면 있는 곳을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틀이 지나자 서울기자들도 교환 양과 친해져 새벽5시 선잠을 깨자마자 전화를 들리면 평양교환 양은 묻기도 전에 평균날씨를 알려줄 정도였다.
「평양 발」「뉴스」의 중계탑 서울「프레스·센터」는 85평 남짓한 넓이. 1개 사에 3,4명씩이 나와 총 1백 여명의 기자들로 붐볐다. 하루에 소비하는 음료수가「커피」5백∼7백잔,「콜라」1백50병∼2백병 기타「복숭아넥타」등까지 합치면 하루 마셔대는 음료수만 1천 잔을 넘었다. 음료수「서비스」를 맡은 한적 안내 김명희 양(22)은「커피」를 나르느라 진땀을 뺐다. 철야근무 조는 각 사에서 날라 온 야전침대와「소파」에 기댄 채 새우잠을 자는 등 「드레스·센터」는 역 대합실 풍경 그대로였다.
한편 평양 발 사진은「파우치」와 전송 편으로 신속히 날라져 환성이 올랐다. 첫「파우치」는 30일 하오1시40분에 서울에 왔으며 이때부터 서울∼평양간을 하루에 두 차례씩 왕복했다.
올 때 짐은 문건·「필름」등이었고 갈 때는 문건 외에 각종신문·주간지·술등이었다. 북한은 육로로 혹은 공로로,「파우치」를 판문점까지 신속히 전달해주었다. <김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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