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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전시하의 정치파동(15)|책략과 실각(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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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2년 9월 25일 발행인이 양우정씨로 돼 있는 연합신문에는 『전 경성부윤 고시진 잠입, 한국내정을 밀탐, 정부요로도 협조, 장 총리가 입국을 허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처럼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기사내용이 바로 장택상 총리로 하여금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문제의 고시진 사건이었다.
일본인 고시진 사건이 큰 정치문제로 번진 것은 당시 일본인의 밀입국 자체가 생각도 할 수 없는데다가 장 총리와 족청과의 팽팽한 대립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장 총리 대 족청계의 제2회전이었다. 부통령선거에서 함태영 후보에게 참패한 족청계는 그 근본원인이 장 총리가 관권을 동원해 이범석 후보의 낙선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장택상 총리의 실각공작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파동 수습과 정·부통령선거를 치르는 동안 장 총리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섣불리 손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외무부에 신원보증 명함 보내>
이 무렵 족청계는 장 총리가 밀입국한 전 경성부윤 고시진과 면담한 사실을 탐지하자 장 총리를 실각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보고 정치문제로 들고나선 것이다.
고시진의 밀입국은 정치파동이 한창 고조된 6월 초순에 있었던 일이지만 족청계의 제2인자인 양우정 의원이 경영하는 연합신문과 D통신은 9월 25일부터 연일 대서특필로 사건을 들고나섰다.
두 「뉴스·미디어」에 처음 보도된 고시진 밀입국 내막은 이러했다.
『일제시대 경성부윤을 지낸 고시진은 52년 6월 11일 일본화물선 안예환(1백t)의 사무장으로 가장하고 부산 적기부두에 입항했다.
고시진은 해방 후 일본인 철수를 주선한 세화회 회장으로 끝까지 한국인과 접촉했고 귀국 후에는 전총독부 정무총감인 전중무웅을 이사장으로 하는 동화협회 이사로 대 한국정보활동을 해온 자이다.
부두에 내린 그는 적기부두에서 해운업을 하는 합동해운사 사원 이일선을 통해 장택상 총리에게 상륙시켜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장 총리는 13일 자기의 명함에다 상륙 신청인에 대한 신원일체를 보증하니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라고 적어 외무부에 보냈다.
고시진은 6월 7일 정식으로 활어구입에 관한 교섭문서를 총리에게 보냈고 다음날 총리는 외무부와 관계부서에 선처해주라는 지시를 했다.
고시진은 부산시내 금호정에서 2박하고 요정 신성에서 25일까지 숙박하면서 장 총리의 동생 장직상, 전 경북지사 김대우, 치안국장 윤우경 등과도 수차 회합했다. 』이렇게 일보를 던진 연합신문은 고시진 사건을 들어 장 총리가 친일정권을 모색했다고 지적하고 연일 특별기사를 연재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족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원외 자유당에서는 총리불신임까지 끌고 갈 기세였다. 부산 시내에는 「백의대」라는 단체이름으로 반민족행위를 하는 장택상 총리를 규탄하라는 벽보가 수없이 나붙고 원외자유당의 장 총리 비난성명이 나돌아 지난날 정치 파동기의 소란을 연상케 했다.
장택상 총리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던지 9월 28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냈다. 『6월쯤 모직에 있는 자가 찾아와 일본인 고시가 수입물자를 실은 선박의 사무장으로 부산에 와 그 배가 체류하는 동안 상륙허가를 얻고자 한다기에 외무부 관계관에게 법규가 허락하는 한 편의를 봐 주라 명령했다.
그 후 고시가 총리실에 와 나에게 경의를 표하겠다기에 면담을 거절하는 것은 너무나 아량이 부족한 듯하여 면회를 허용한 일이 있다. 이 때 고시가 무역관계를 말하기에 이것은 소관당국과 교섭하라고 돌려보냈다.
모든 것은 이것뿐이다. 지금 이것을 떠드는 자들은 해방 전에 고시를 만나 고두재배하고 노안비슬로 상전같이 섬겨온 자들로 까닭없이 원한을 나에게 품고 처음부터 모략과 중상을 일삼고 집중공격을 하고 있음은 국민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 같은 성명이 나오자 연합신문은 다시 장 총리가 써주었다는 명함사진을 싣는 등 더욱 더 공격에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장 총리는 신원보증명함에 기재된 필적이 자기 것이 아니고 인장과 명함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발표하고 신문을 걸어 부산지검에 고소함으로써 사건은 검찰청으로 이송되어 법의 판가름을 받게 됐다.
사건을 맡은 당시 대검찰청 이정우 검사는 사건진상을 캐기 위해 갈홍기 외무부차관을 소환 심문했고 신성주인 이사규·김대우 등을 구속해 사건은 더욱 복잡 미묘해졌다.
당시 이 사건에 관련됐던 한 관계자의 얘기.
윤우경씨(전 치안국장·전 문화재관리국장·72) <내가 치안국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박병배 치안국 교육과장과 신성에 저녁 먹으러 간 일이 있었어요. 주인이 좋은 방을 못 드려 죄송하다면서 특실에 고시란 일본인이 와있다고 해요. 지난날 경성부윤 지낸 자임을 알고 가만있을 수 없어 그 방에 들어가 나는 치안국장인데 언제 어떻게 왔으며 며칠간 체류하느냐는 것 등을 묻고는 사찰과장에게 형사를 배치해 미행하고 매일 보고하도록 지시했어요. 이 사실을 김장흥 대통령 경호관에게도 알렸어요.
그 후 치안국장을 그만두고 서울 와있으니 대검에서 고시사건으로 조사할 게 있다고 오라고 합디다.
이정우 검사가 맡았는데 부산에 가니 김대우씨 등이 이미 구속돼있고 일부 보도에는 나도 곧 구속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돌고 있더군요.
나는 불심 검문한 사실과 김장흥 경무관에게 알린 사실 등을 모두 말했어요. 그러나 검찰은 내가 고시와 접촉한 것으로 생각하고 구속할 눈치입디다. 조사 받는 동안 맹장수술을 받고 입원해있는데 서울에 있는 김형익 박사가 고시가 일본 가서 기자회견 한 조일신문을 보내왔어요. 거기에 보니 자기가 한국에 가 치안국장한테 불심검문 받았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 신문을 증거로 제출해 나는 구속당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에 출두한 갈홍기 외무부차관은 장 총리 주장과는 달리 그로부터 백지위임의 명함을 받아온 사실을 밝혀 장 총리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사건의 진상이야 어떻든 족청계의 진헌식 내무장관이 장관인 장 총리를 비난하고 백의대라는 이름의 장 총리 규탄벽보는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총리와 맞선 것은 당시 미묘한 정치풍토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사건이 말썽 난 지 1주일만인 9월 30일 장택상 국무총리는 고재봉 경무대비서관을 총리실로 불러 그 자리에서 붓으로 사임서를 써주고는 총리공관을 나와버렸다.
족청계의 공격에 사실상 단신으로 맞서 싸우던 장택상씨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장택상 총리를 실각시킨 족청계는 이번에는 지난 부통령선거 때 협조하지 앉았던 원외자유당 내 비족청 세력의 숙청에 나섰다.

<한마디 망언으로 자멸 불러와>
이 숙청작업은 차차 비대해지는 원외자유당을 족청 일색으로 하고 이범석 장군의 재등장을 도모하기 위한 작업이었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원외자유당의 내분을 조성하고 비족청계의 거센 반발을 일으켜 오히려 자기의 몰락을 가져왔다.
원외자유당을 주도하고 있는 족청계의 반족청세력 숙청공작은 53년 5월 대전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계기로 절정에 달했다.
이 무렵 족청계는 백두진씨가 총리로 임명됐고 상공부장관에 이재형씨, 내무에 진헌식씨, 농림에 신중목씨가 입각해 강력한 세력기반을 갖고있었다.
족청계의 신형식씨를 위원장으로 구성된 원외자유당 특별징계위원회는 국민회의 이활, 노총의 조경규, 한청의 유지원·유화청 등 비족청 거물간부들을 반당분자로 몰아 제거할 움직임을 보였고 각 지방당부에서도 족청 일색으로 개편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형식 씨가 53년 6월 25일 청주에서 열린 6·25기념식에서 행한 한마디 망언이 그만 완전 거세위기에 처한 비족청계에 반격의 기회를 주고 말았다.
연사로 나선 신형식씨는 이 기념식에서 「위대한 영도자 이범석·김일성 장군을 따르자 운운」의 반역 언사를 했다가 부랴부랴 취소했지만 비족청계는 족청공격의 물실호기라고 국회의 특별조사위까지 구성했다.
또 이 사건에 이어 광주·여수 등지에서 자유당간부(주로 족청계)의 통비사건이 드러나 정치문제로 번지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족청의 낙조를 고하기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신중목 농림장관의 농촌잡부금 발언이 또 문제됐다. 이 박사는 휴전 후 국정쇄신을 내걸고 공무원 25%를 감원하여 이를 재원으로 공무원 처우개선을 추진하는 한편 기부금 금지법의 실시강화로 농촌잡부금을 일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신중목 농림장관이 9월 10일 『현재도 농촌잡부금이 수10억환에 달하고 경찰관의 기부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폭로한 것이 이 박사의 비위를 건드려 이 박사는 신 농림장관과 진헌식 내무장관을 파면했고 곧이어 이재형 상공부장관도 물러앉았다.
그 후임에는 정당배경이 없는 대법관출신의 백한성씨가 내무, 경남지사인 양성봉씨가 농림, 안동혁씨가 상공장관에 각각 입각했는데 이들 3부 장관의 경질은 족청제거의 「클라이맥스」를 이룬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 원외자유당 당수는 동당의 정·부당수제를 폐지, 총재제로 조직을 개편해 부당수인 이범석씨를 평당원으로 격하시키고 9월 12일에는 『자유당에서 파벌작용을 하며 반당행위를 하는 족청계를 축출하고 당을 정화하라』는 특별선언을 하고 이기붕·이갑성·배은희 3인에게 당내정리를 명해 당내 족청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기붕이 실권자로 등장>
더구나 연합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정국은이 국제간첩사건으로 체포되고 정씨를 은닉, 방조한 혐의로 족청계의 제2인자인 양우정 의원마저 구속되자 족청의 기반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이기붕씨가 이 박사 다음의 실권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은 재집권을 노리는 이승만 초대대통령 지지세력과 한민당·흥사단·임정계의 대립에서 시작되어 이 박사의 승리로 끝나고는 이어 여당내분으로까지 번졌다가 족청계의 몰락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파동에서 각 세력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내세워 대결해 그 시와 비를 한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거칠고 난폭했던 수단과 방법은 한국근대정치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요일지(1952년 3월 24·25·26·27일)
※24일공중전에서「미그」5대 격추파 11대에 손해▲미공군, 공산군 수송로에 맹공격▲상이군인기술학교 개교
※25일▲미공군 1천1백99회 출격▲「덜레스」미국무성고문 사임
※26일▲휴전감시안 회의, 10개 출입항에 합의▲이 대통령 77회 생일축하
※27일▲상공에 이교선 씨, 체신에 조주영 씨 임명
※알림=『전시하의 정치파동』은 오늘로 끝내고 28일(월)부터는 한국전쟁시말과 여러모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스탈린의 죽음』을 다룰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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