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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전시하의 정치파동 ⑫|대통령 저격 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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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제 구락부 유혈사건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6·25기념식에서 이승만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나 정국을 더욱 어수선한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범인 유시태가 쏜 탄환이 비록 불발탄으로 그치긴 했으나 때가 때인 만큼 이 사건이 여야에 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 이 사건에는 이 대통령의 반대세력인 민국당 인사들이 상당히 관련됐다는 의혹에서 이 대통령에게 보다 강경한 대야정책을 쓸 구실을 마련해준 계기가 됐다.
사건은 정치파동이 한창 고조된 무렵인 52년6윌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거행된 6·25기념식에서 일어났다.
기념식에서 이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는 동안 식전에 마련된 귀석 석에서 갑자기 60세 가량의 노인이 튀어나와 이 대통령의 바로 등뒤에서 권총을 쏘려 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윤자경 치안국장에게 잡혀 특무대로 이첩 됐다.
범인은 전 의열단이었으며 현 민국 당원인 유시태(62)로 밝혀졌다.
사건 다음날 경찰은 범인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전 민국 당이었던 무소속의 김시현 의원을 구속하고 또 민국당 소속의 노기용 의원을 공범으로 구속했다.
당시 식장경비를 지휘하던 관계 경찰관의 얘기.

<사전정보 얻어 식장경비만전>
▲윤자경씨(당시치안국장·전문화재관리국장·72) <6월 중순께 나는 김시현 의원이 이 대통령 암살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고 김시현 의원이 현역국회의원이고 혁명투사였기 때문에 섣불리 잡아넣을 수 없었어요. 6권23일 나는 김시현 의원을 좀 만나자고 했더니 나의 사무실로 옵디다.
내가 김 의원에게 털어놓고 얘기 좀 하자면서 근간에 이 대통령 암살계획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김 의원이 관련된 게 사실이냐고 했더니 김 의원은 갑자기 술 취한 체 하면서 횡설수설해요.
한 시간쯤 얘기했으나 엉뚱한 얘기만 하길래 돌려보냈어요.
다음날 나는 대통령경호책임자인 김장흥 경무관에게 이 같은 사실을 말하고 6·25기념식에 이 대통령이 안나오시게 하라고 말했더니 그날 늦게 안 가시도록 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도 혹시나 싶어 6·25기념식 때는 식장주변 2층에 사복경찰을 배치했습니다. 내가 식장 경비를 지휘하고 있는데 이범석 내무부장관이 부르더니 대통령을 모셔오라고 해요.
대통령이 안나오시도록 돼있다고 했더니 덮어놓고 가서 모시고 오라는 거예요.
대통령 관저에 갔더니 김장흥 경무관 말이 내무장관이 와서 기념식에 꼭 참석하셔야 한다고 조르는 바람에 나가시게 됐다고 합디다.
나는 불안감을 갖고 이 대통령을 모시고 식장으로 갔읍니다.
연단은 30평 가량의 널판으로 돼 있고 좌측에는 국무원 석, 우측은 외국사절 석, 그 뒤가 국회의원 석 이었어요. 나는 앉을 자리가 없어 식장 통로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어요.
이 대통령이 연단에 서서 기념사를 하는데 대통령과는 불과 1m도 안 되는 국회의원 석에서 누가 일어섭디다.
나는 소변보러 가는가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대통령 등뒤에서 권총을 뽑아요. 아찔합디다. 나도 모르게 『이놈아』고함을 치며 뛰어가 팔을 잡고 넘어뜨렸어요. 나도 전혀 무의식중에 달려든 거예요.

<김시현 의원이 권총 제공편의>
범인은 순간 불발인 것을 알고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것을 한미 합동헌병대의 어느 미군대위가 발로 권총을 밟았어요. 범인을 잡아 경찰이 연단 아래로 때리면서 끌고 가는데 이 대통령은 태연한 자세로 연설을 계속합디다. 연설을 끝내고는 비로소 『때리지 말도록 하라』고 합디다.
장택상 총리와 내가 대통령에게 그만 관저로 가시도록 권했더니 대통령은 『신당희 국회의장이 얘기를 하고있는 도중에 어떻게 자리를 뜨느냐』고 그냥 앉아 있다가 신의장의 기념사가 끝나자 관저로 돌아갔어요.>
경찰은 김시현 의원이 권총을 입수해 유시태에게 주었고 유가 식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 휘장이 달린 자기양복을 준 사실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27일에는 민국당상집 부위원장인 서상일, 역시 민국 당원인 정용환, 인천 소년 형무소 장 최양왕, 전 서울고법완장 김당진 등이 공범자로 구속됐고, 유시태와 공범 등의 모의장소를 제공해준 안동약방 주인 김성규 최태현 방주혁 등이 음모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돼 이 사건으로 구속된 자는 12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이 나자 부산시내에는 민국당에 의해 이 대통령 암살음모가 계획됐다는 벽보가 나붙고 아직 사표수리가 안된 부통령 김성수씨도 이 사건에 관련돼 곧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28일 국회는 박영출 의원의 긴급동의로 보류중인 김성수 부통령의 사표를 즉시 수리하자는 결의안을 재석98명 중 찬83표로 가결됐다.
한편 원용덕 계엄사령관과 윤우경 치안국장, 이동초 경남경찰국장, 김장흥 경무대경무관 강준 부산서장 등이 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으나 이동철 경남경찰국장의 사표만 수리되고 그후임에 치안국 교육과장인 박병배 경무관이 27일자로 발령됐다.
이 사건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야당인사들이었다. 이른바 국제공산당사건과 국제구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에게도 관련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했고 피신한 국회의원들을 국회에 등원케 하는 심리적 압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에 관한 관계자의 증언.

<민국당 와해목적의 범행 설도>
▲유진산씨(당시 민국당 총무국장·전 신민당 대의위원·현 국회의원·67) <내가 국제구 사건으로 유치장에 들어가 독방을 쓰고있는데 하루는 청년 한사람이 들어옵디다.
그는 여당과 집권층에 욕을 하며 나가면 그냥 안 두느니 폭탄과 권총을 준비했다는 등의 말을 해요. 이 청년은 저녁때만 되면 불려나갔다가 2시간쯤 지나 들어오는데 어떤 때는 술 냄새를 풍기기도 했어요.
6월25일 저녁에는 나갔다오더니 이 대통령 저격사건을 얘기하면서 『노인이라서 실패했지 나 같으면 성공했다』면서 분개합디다. 나는 민주주의에서 「테러」는 금물이라고 나무랐는데 그날이후부터 다시는 안 들어오더군요.
27일 김창흥 특무대장에게 불려나갔는데 심문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6월23일 말하기를 6월25일이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면서 나를 대통령 저격사건에 관련시키려 합디다.>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사건이 나자 일부에서는 정부와 여당이 야당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조작극으로 보았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김시현 유시태 두 피고는 이 박사를 정말 제거하려고 했다는 진술을 함으로써 조작극이 아니라고 했지만 일부 변호인은 피고들이 민국당을 와해시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피고와 상반된 변론을 해 의문을 남기기도 했다. 이 사건의 제1회 공판은 8윌22일 김용식 재판장, 강안희 김영세 판사배석 김달기 검사간여로 부산지법 4호 법정에서 열렸다.

<불발 위해 총을 3일간 물에 담가>
김시현 피고는 『나는 사변이 나자 그를 용납할 수 없는 자로 보았다. 북괴의 남침도 모르고 6·25가 나자 허위 보도만 하고 녹음방송으로 국민을 기만했다. 국민방위군사건이 나자 나는 그를 죽이려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가 혁명투사로 나의 선배라는 걸 생각하고 불발탄에 의해 경고만 해주기로 했다. 추용환으로부터 권총을 샀을 때 그 권총의 성능이 나쁜 것을 알았고, 또 불발로 하기 위해 3인간 물에 담가 두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장후영 나재성 두 변호인은 김·유 무 피고는 살의 없이 한 것이고 민국당을 탈당한 후 민국당을 와해시키려는 연극을 한 것이며 장난감 총으로 민국당에 대한 원심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변론을 해 묘한 여운을 남기었다.
그러나 이점에 관한 경찰 측 주장과 발표는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윤우경씨<이 사건은 처음부터 특 무대에서 취급했는데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얘기해 유시태씨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니 밤에 유씨를 내사무실에 보내줍디다.
내가 유씨에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분이 왜 이 박사를 저격했느냐』고 했더니 잠자코 있읍디다. 나는 증거로 하려는 게 아니니 솔직하게 말만 해달라고 했더니 유씨가 『나도 개죽음이야 하려했겠소. 이박사가 살해되면 즉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계획이었소. 3개월 만 고생하면 된다는 보장을 받고 안동에 사는 가족에게 3개월 지내도록 양식을 사주고 왔소』라고 합디다.
누가 그런 보장을 주더냐고 물으니 『당신이 짐작하면 알게 아니오』라고 합디다. 나는 더 이상 캐면 정치에 혼란만 더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더 추긍하지 않았어요>
이 사건에 관련됐던 김시현 유시태는 사형, 서상일 징역6년, 백남훈 3년, 김성규는 7년의 실형이, 그리고 나머지는 무죄 또는 벌금형이 선고됐으나 김시현 유시태는 대통령의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확정됐다가 4·19후에 모두 풀려 나왔다.
◇주요일지 (1952년3월12·13·14·15일)
※12일 ▲적, 동부전선서 공세 ▲공중전 서 「미그」4대 격추 ▲공비소탕 1년간 전과발표, 사살·귀순 1만9천3백45명
※13일 ▲미 공군의의 북한출격강화 ▲거제도 포로수용소폭동
※14일 ▲포로교환 분위 회의, 교착계속 ▲유인일황, 「로이터」지배인과 회견 ▲소련, 신형 「미그」기 개발 설
※15일 ▲미군 「탱크」대, 서부서 공세 ▲전국 피란민 등록실시▲「트루먼」「컬럼비아」대학서 대외원조 계속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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