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발박사' 장만우 명장님, 월 매출 6000만원 비결 뭡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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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의 생명은 커트”라고 강조한 장만우 대표는 “이발소에서 일하던 때부터 커트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고 말했다. 기존의 머리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도록 가늘게 쳐내는 게 장 대표의 비결이다. [강정현 기자]

또래 친구들이 교복 입고 자전거 타고 학교에 가던 시절 장만우(59) 대표는 이발소로 ‘출근’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던 장 대표는 형님 만국(61)씨가 대전에서 이용기술을 배워 와 동네에 이발소를 차린 뒤로는 이발소를 직장처럼 꼬박꼬박 나갔다. 농사일보다 훨씬 손에 빨리 익었고 재미있었다.

 “동네에 이발소는 있었는데 미용실은 거의 없었어요. 미용 기술을 배우고 싶었죠.”

 이발 기술을 익히면서 점차 꿈이 커졌다. 그런데 어렵게 시작한 미용 공부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머리를 길러서 수강생들끼리 모델을 해줘야 했기 때문에 장발을 고집하다가 아버지께 호되게 혼났고 경찰의 ‘장발단속’을 피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고집을 부려 충남 청양에서 대전까지 유학을 갔는데 ‘미용학원은 남자를 받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며칠을 찾아가 통사정을 한 끝에야 학원에 다닐 수 있었고 470명의 응시생 중 ‘청일점’이던 장 대표는 두 달 만에 미용자격증을 따냈다.

지난해 9월 장 대표는 고용노동부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기능인인 명장으로 선정됐다.

 순풍에 돛 단 듯 취업이 됐고 미용실은 문전성시였다. 스무 살도 안 된 남자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기 위해 멀리서도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 뭔가 되려나’ 싶을 때 진짜 시련이 찾아왔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머리가 숭숭 빠지기 시작한 것. 장 대표는 “탈모가 4대째 유전이라지만 그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고 탄식했다. 결혼은커녕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는 고민 끝에 가발을 사서 쓰고 지금의 부인에게 청혼했다. 부인은 결혼한 후에야 남편이 탈모란 사실을 알았단다.

 “가발에 고맙잖아요. 이걸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미용업을 하는 분이 가발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렇게 우연히 시작한 일에 장 대표와 형인 만국씨가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손수 만든 가발을 직접 써본 후 용기가 생겼다. 전국의 탈모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 이거야말로 잘만 하면 돈 되는 사업이란 생각이 밀려왔다. 장 대표는 “사업 초창기에는 차에서 자고 반찬 없이 밥만 먹어가며 그저 가발에만 몰두했다”고 말했다.

 2년 후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서울가발박사라는 가게를 냈다. 큰 트럭에 자신의 대머리 사진과 가발 착용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붙여서 끌고 다녔다. 이동하는 광고판인 셈이다. 연구도 계속됐다. 좀 더 자연스러운 가발을 만들기 위해 온 가족이 밤잠을 설쳐가며 일했다.

 “가발의 세 가지 문제는 쓰면 머리가 아프고 불편하다는 점, 벗겨질까봐 늘 신경 쓰인다는 점, 남들이 봤을 때 티 난다는 거예요. 그 고민을 없애주는 게 좋은 가발이죠.”

 원래 머리처럼 감쪽같은 가발을 만드는 건 자신 있었다. 그가 귀띔한 비결은 커트. 처음에 긴 머리로 가발을 만들어와서 손님에게 씌우고 장 대표가 직접 자른다. 그는 “가발모의 끝을 붓끝처럼 뾰족하고 가늘게 잘라야 원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편하고 머리에 착 감기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안 해본 시도가 없었다. 대머리 네 군데에 단추를 붙이고 가발에는 반대쪽 단추를 붙여 고정시켜보기도 했고, 핀과 테이프도 써봤다. 벨크로(찍찍이)의 부드러운 부분을 머리에 붙이고 갈고리를 가발에 달아 붙여도 봤다. 그런데 “가발을 벗고 목욕탕을 갔더니 사람들이 흉하게 쳐다본다”는 불만부터 시작해 “가발 벗다가 원래 있던 머리까지 뽑혀 나간다”는 푸념이 들려왔다. 장 대표는 계속해 더 편안하고 안전한 가발을 고민했다.

 그 결과 앞부분은 테이프 대신 살에 쉽게 접착되는 밴드로, 뒷부분은 머리카락에 붙어 고정될 수 있는 특수 벨크로로 돼 있는 가발을 개발해 냈다. 아프지 않고 접착력도 높은 데다 모자처럼 쉽게 쓰고 벗을 수 있어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2011년 4월 특허도 6개나 취득했다.

 장 대표는 “가발을 단순히 사고파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며 “이·미용 기술 없이 뛰어들면 실패하기 좋다”고 말했다. “모든 일이 그렇잖아요. 자격증 없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수 없고, 연구하지 않는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요. 가발 역시 마찬가집니다.”

 장 대표는 손님을 만나면 일단 머리스타일을 유심히 살핀다. 탈모 이전 가르마나 손님의 얼굴형, 모발의 상태를 꼼꼼히 따져 ‘머리가 풍성하던 바로 그때’로 돌아가게 해준다. “손님들에게 의견을 가감 없이 들었어요. 반품도 군소리 없이 받고 뭐가 잘못됐는지 계속 연구하고. 연구에 10억원 정도 투자했습니다. 그렇게 5~6년 하니까 이젠 사람 얼굴만 봐도 스타일이 딱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미국·중동·동남아에서 찾아오는 고객들은 물론 꼬불꼬불하고 탈모가 많아 ‘고난도’로 불리는 흑인 고객도 단골이 됐다.

 서울가발박사의 가발은 30만~150만원. 다른 가발업체에 비해 결코 싸지 않다. 그런데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 달에 150~200명, 매출은 5000만~6000만원 선을 꾸준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는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동네 병원 다니다가 안 되어 대학병원 오는 심정으로 찾아온다”며 “다른 데서 가발을 맞췄다가 실패했거나 가발을 오랫동안 써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얼마냐’고 묻는 게 아니라 ‘제대로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탈모인들의 고통을 가장 잘 안다는 것도 사업에 도움이 됐다. “머리가 없는 사람은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모자를 벗어야 하기 때문에) 양복을 잘 안 입고 남 앞에 잘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 아픔은 우리가 정말 잘 알아요. 그래서 상담할 때도 공감대 형성이 빠르죠”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장 대표는 손님들의 스타일에 더 세심하게 신경 써준다. 옷 하나만 가지고 입으면 빨리 닳고 지겨운 것처럼 탈모인에게도 짧은 머리·펌·염색 등 하고 싶은 스타일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휴일이 없다. 24시간 고객의 전화를 받고 꾸준히 세척과 수선 서비스를 해준다. ‘한 번 내게 머리를 맡긴 사람은 평생 책임진다’는 철학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딸과 함께 찾아오는 아버지, 취업을 앞두고 고민 끝에 가발을 맞추러 온 청년, 남몰래 눈물 훔치는 젊은 여성들이 결혼하고 취업해 고맙다고 찾아올 때가 그에겐 가장 기쁜 순간이다. 특히 원인 모를 병으로 머리카락이 나지 않아 의기소침해 하던 일곱 살 어린아이가 가발을 맞춘 후 초등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그에겐 힘이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연구하며 이 일 하고 싶어요.” 이날도 벌써 10여 명의 손님을 맞은 그의 가위는 쉴 줄을 몰랐다.

글=채윤경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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