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윤치영<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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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와이 시절 ②>
「하와이」의 「가이무끼」언덕에는 대 여섯 명의 땅위에 세워진 이박사의 2층 목조건물이 있었다. 말이 2층이지 아래층에 방 하나, 위층에 하나로 돼있는 오두막이었다. 이 집은 이박사가 1919년엔가 「하와이」에 건너와서 손수 나무를 자르고 판자를 만들어지었다. 물론 교포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이 박사는 목공일에도 목수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박사는 다재다능한 편이었고 일에는 신분지위를 생각하지 않았었다. 국제법 뿐 아니라 법철학 신학분야도 공부했다.
모든 노동을 신성시하고 존중하여 서슴없이 해내는 것도 특징의 하나였다. 그러한 품성은「하와이」의 동포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고 힘이 되었었다. 당시「하와이」의 교포들은 거의가 사탕수수 밭이다. 「바나나」·「파이내플」또는 야채 밭에서 일했다. 시중에 나가서 식료품이나 중고품 가구를 파는 가게쯤 가진 교포는 귀족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따라서 생활은 전반적으로 외로 왔고 고달팠다. 농장노동이라야 1일 고용이어서 하루 수입은 1「달러」50 「센트」가 고작이었다.
이 박사도 광복운동연락이나 기독학원 또는 교민단·교회의 일이 뜸해지고 시간이 날 때면 하루 품삯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 박사는 음식이나 의복생활에 있어 상상외로 단순 검소했다. 그가 양말을 꿰매 신은 일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한 두벌의 양복을 스스로 빨고 꿰매 입었고, 대개 아침은 15「센트」정도의 빵과「콜라」로 때웠다. 점심이라야 25「센트」를 들여 빵에다 야채 「수프」를 곁들인 것이었다.
그때의 「하와이」에는 애국부인회가 있어서 열성 있는 부인들이 여가가 나는 대로 김치도 담가주고 살림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매일과 같이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박사는 김치 담그는 솜씨도 대단했다. 저녁만은 김치에 쌀밥으로 모국 맛을 보고싶어했다. 그런 이박사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나도 따라서 검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하와이」에 머무를 것을 결심하자 이 박사는 내게 「하와이」대학에 다니도록 권했다.
거기에서 일본의 조도전 대학에서 닦은 국제법과 외교학의 기초를 다시 수학하면서 미국의 독립운동사와 민주주의발달사를 공부하드록 권했다. 고국에서는 월1백 「달러」씩 학비 조로 부쳐오곤 했다. 당시의 물가지수로서는 학비나 용돈에 부족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시절처럼 자유분방하거나 호화로울 수가 없었다. 일본시절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한 달에 두어 벌의 양복을 해 입는 취미가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에 가서 이 박사와 같이 생활 하면서는 그런 멋이나 취미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박사와 나는 주에 두어 번씩 섬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찾아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기도 하고 강연도하며 이국의 고독을 달랬다. 그때마다 동포들의 고마워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념에 간을 맞춘 김치에 된장국으로 쌀밥을 대접받던 생각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와이」의 이 박사는 심한 불면증으로 밤을 두려워했다. 그러한 이 박사를 따라 때때로 나는 「가이무끼」의 밤 언덕을 올라갔다. 그는 밤늦게까지 성경을 읽거나 독서를 하며 쓰기도 하고, 밤의 대양을 멀리 내다보기도 했다. 그가 붓을 들고 한시를 즐기기 비롯한 것은 「하와이」에서가 아닌가 한다. 불면증으로 밤을 지샐 때면 그는 기도와 시작을 했다. 그때의 이 많은 시들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 그립다.
이 박사와 나는 「가이무끼」언덕을 내려와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달밤의 해변을 자주 산책했다. 그는 산책을 즐겨 나의 방문을 기다리곤 했다. 특히 그는 바람에 일렁이는「가이무끼」언덕길의 풀밭을 걸으며 『언제 우리는 동대문 밖의 청량리들을 거닐면서 모국 보리밭의 황금물결을 볼까』 라고 독백처럼 망향을 중얼거리곤 했다. 이 박사에게는 좀처럼 눈물이 없었다. 연연한 정서를 그는 의식적으로 꺼려했다.
부모에 대한 불효의 죄의식에 젖을 때 그는 심각해졌고 눈물을 머금었다. 그 외엔 거의 약한 표정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 소년시절부터의 몸에 밴 수난과 고독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의지의 인간으로 굳혔는지 모른다.
이 박사를 평생토록 지배한 것은 천직이라는 관념이었다. 그는 그의 광복운동을 천직이라고 신념 했다. 하느님이 주신사명이며 책무라는 것이다.
외로우나 고달프나 굶주리거나 헐벗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답답하거나 괴롭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어떠한 핍박을 당하든 우리 한민족의 사명은 광복운동이라고 그는 스스로의 신념을 역설하곤 했다.
이 박사는 그 천직이란 단어를 「퓨어리터니즘」에서 얻은 듯 하다. 「퓨어리턴」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천직으로서 구국운동에서 사적인 공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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