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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전시하의 정치파동(6)|국제공산당사건(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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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2년 5월 26일 새벽,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에 앞장선 야당 국회의원들은 군·경합동반에 의해 느닷없이 헌병대로 연행 돼 갔다.
정부는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재빨리 야당의원들을 강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헌과 대통령 선출 문제 등으로 여·야의 대립이 격화된 때 계엄이 선포됐기 때문에 야당의원들도 심상찮은 사태발생을 예측은 했으나 이렇게 신속한 기습으로 국회의원들을 연행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너무나 급격한 사태진전에 충격을 받고 신변위협을 느낀 야당 의원들은 국회에 나가 진상을 규명하는 한편 최악의 경우에는 국회의사당에서 버티는 것이 안전하다고 26일 오전 국회 통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날 상오 9시 동래를 출발한 국회 「버스」는 20여명의 야당의원들을 태우고 30분쯤 후에는 광복동에 있는 의원 휴게소에 도착했다.
일단 차에서 내린 의원들은 대기 중이던 동료의원들과 사태진전을 논의한 결과 의사당 안에서 버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단정하고 40여명이 다시 「버스」에 타고 국회로 향했다.

<의원 버스 뒤에 줄 매달고 끌어>
5분도 못돼 「버스」는 임시 의사당인 경남도청 정문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절반쯤 정문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무장한 헌병 20여명이 상부의 지시로 불심검문을 한다고 앞길을 막았다.
그러나 의원들은 이유 없는 헌병들의 검문에 응하지 않고 안에서 문을 굳게 닫고 고함을 지르며 운전사에게 의사당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완강히 버티는 의원들과 무장 군인들의 승강이는 1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인파로 콱 메워졌다.
이런 숨막히는 승강이가 계속되다가 정오쯤 헌병들은 공병대에서 가져온 「크레인」에「버스」뒤를 매달고 헌병대로 끌고 갔다.
뒷바퀴가 추켜 들린 채 끌려가는 「버스」안에는 4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다음은 세계 의정사상 별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 이것은 후진국가에서 정쟁이 가열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난다는 한 사례였다.
▲유병국씨(당시 부산지구 헌병대장=중령·예비역대령·현사업·49)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올 때 현장 지휘책임은 조영집 소령이 맡고 있었습니다.
조 소령 말에 의하면 계엄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수영에 주둔하고 있는 공병대에서 가져온「크레인」으로 「버스」를 끌고 왔다고 합디다.
국회의원이 의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체포할 수 없으니 「버스」가 의사당 정문에 절반은 들어가고 절반은 밖에 있을 때 끌고 왔다고 하더군요.
나는 「버스」가 헌병대에 끌려왔을 때에야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었다는 걸 알았고 당국에서 그 안에 있는 몇몇 의원을 체포한다는 걸 알았으나 무슨 혐의인지는 몰랐습니다. 나는 그때부터는 직접 지휘를 맡고 국회의원들을 모두 내려오게 하고 체포대상인 의원을 가려내도록 지시했어요. 그런데 상부에서는 무조건 일단 모두 가둬 두라고 합디다.>
▲곽상훈씨 (1, 2, 3, 4, 5대 의원·전 민의원 의장·현 육영재단 이사장·77) <내가 탄 국회 「버스」가 광복동 의원휴게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들을 태우고 국회의사당 입구에 오니 20여명의 헌병이 앞을 막아 『어떤 놈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버스」를 못 들어 가게 하느냐』고 고함을 치고 야단을 쳤지만 헌병들은 상부지시로 검문한다고 문을 열라고 합디다. 안에서는 꼭 닫고 열어주지 않았어요.< p>

<구경하던 여학생 울음 터뜨려>
1시간 이상이나 승강이가 계속됐는데 나중에는 「크레인」으로 「버스」뒤를 매달고 헌병대로 끌고 갑디다. 우리들의 모습이 처량했는지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울더군요.
헌병대에서 이것저것 묻고 몇 사람을 감금하더니 나는 내보내 줍디다. 그러다 2일만에 다시 의사당 안에 사복청년들이 찾아와 나보고 가자고 해요. 외국 기자들이 나에게 피할 곳 있으면 자기들이 데려다 줄테니 나가자고 하기에 나는 『호의는 고마우나 이것은 우리의 정치 싸움인데 그럴 필요까지 없다』면서 청년들을 따라 헌병대로 갔습니다.>
한편 3일 만인 28일에야 구속된 의원들의 전모가 밝혀졌는데 26일 새벽 집에서 끌려간 의원은 민우회의 장홍염, 원내자유당의 정헌주, 민국당의 양병일 의원 등 3명이고 「버스」에 탔다가 구속된 의원은 무소속의 곽상훈, 민국당의 서범석·임흥순, 민우회의 김의준·권중돈, 무소속의 이용설, 원내자유당의 이석기 의원 등 모두 10명이었다. 10명의 국회의원을 구금하면서도 정부당국은 이때까지 아무런 이유도 밝히지 않았으며 구속된 의원들도 자기들이 개헌추진에 앞장선 야당의원이었기 때문에 당국의 속셈은 짐작했으나 막상 구속사유는 알 수 없었다.
「버스」 사건이 났을 때만 해도 계엄사령부는 이렇게 발표했다.
『계엄령 하 각 기관을 경비 중 26일 오전 10시 30분 1대의 「버스」가, 임시 중앙청 앞 검문소를 무단 돌입하므로 이를 제지하고 차내에 있는 인원의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운전사에게 계속 전진을 명했다. 경비원은 사태의 괴상함을 인식하고 전진을 제지하려드니 차안에서는 운전사만 도주하고 응대가 없어 부득이 견인차로 제70 헌병대로 직행했다. 헌병대에서 검문 불응자의 명부를 상부에 보고하여 조회하였던 바 그들이 국회의원임이 판명되었고 지시에 의해 자유로 행동하도록 조처한 것이다. 』
▲윤우경씨(당시 치안국장·전 문화재관리국장·72) <26일 새벽 1시쯤 국방부 장관이 부른다고 전화가 왔어요. 장관실에 가니 원용덕 계엄사령관도 와 있습디다. 신태영 국방장관이 국회의원을 체포하기로 내무·법무장관과 합의됐으니 형사 30명을 동원하라고 해요. 무슨 죄목으로 체포하느냐고 물었더니 죄명은 알 필요도 없다면서 무조건 형사 30명만 보내라고 해요.
아침에 치안국에 나갔더니 국회의원 14명중 12명을 체포했다고 보도합디다.
그러고 있는데 국회 「버스」가 헌병대에 끌려갔다는 보고가 들어와요.
거기를 가 보았더니 「크레인」이 「버스」를 끌어당긴 채로 있는데 그 안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습디다.
나는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확인하러 관저로 달려갔어요. 복도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버스」사건을 말씀했더니 부인께서 이 박사한테 갔다 오겠다고 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께서 『왜 국회 「버스」를 끌고 갔느냐』고 하시면서 즉시 석방하도록 윤 국장이 신 장관과 원 장군에게 말하라고 한다는 말씀을 합디다.>
정부는 국회의원을 구속한지 4, 5일 후에야 그들이 공산당의 자금을 받아 정부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차기 대통령 장면추대 동조">
『국회의원 정헌주 김의준 엄상섭 등은 과거 공산주의 사상 보지자 또는 동정가였던 바 자기들을 추종하는 국회의원들과 함께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가장한 선우종원 민영수 한웅길 등과 52년 4월부터 수차 회합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소위 대한민국정부 혁신 전국 지도위원회에 동조하여 이 단체에서 추대하는 장면씨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할 조건하에 선우종원 등으로부터 동인이 좌익계통에서 입수한 정치자금을 수수하여 정부를 전복 할 목적달성을 방조한 사실이 판명되어 그 조직체계 등을 계속 수사 중에 있다」 정부는 이렇게 관련 국회의원들이 공산당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지만 구속 의원들은 더러는 엉뚱한 횡령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고 또 대부분은 조사도 받지 않고 40여일간 구속돼 있다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무혐의로 풀려 나왔다. 물론 이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관계자들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정헌주씨(당시 국회의원·현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56) <5월 25일 오위영씨 집에서 엄상섭씨 등과 함께 있는데 곧 계엄이 선포되고 개헌 주도파 의원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가 들립디다. 그분들이 피하자고 하기에 나는 국회의원 체통도 있고 또 피한다면 어디로 가겠느냐면서 집에 와서 잤어요.
26일 새벽에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청년 몇 명이 들이닥쳐 특무대 명찰을 보이면서 같이 가자고 해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모든 것을 체념하고 그들을 따라 초장동 어느 집으로 갔어요. 나중에 장홍염·이석기·곽상훈·서범석 의원 등이 잡혀옵디다.
3일 후에 중대발표가 있다 해서 「라디오」를 들어보니 우리를 국제 공산당으로 모는 거예요. 김영선·오위영씨 등이 일본 공산당의 돈을 받았는데 당신이 그 돈을 받아 쓴 게 아니냐고 몇 마디 묻더군요.
군재에서 몇 번 재판 받는데 번번이 사실심리는 한번도 없고 인정심문만으로 끝냅디다.
7월 4일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국회로 데리고 가더니 그날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그대로 내 보내데요. 그 후는 아무 말이 없습디다.>
▲장홍염씨 (1, 2대 국회의원 현 사업·63)<26일 새벽 4시쯤 자고 있는데 요란하게 문을 두드립디다. 헌병들이 상부의 명령으로 데리러 왔다고 해요.
헌병대에 가서 30분쯤 있으니 정헌주 양병일 의원 등이 들어옵디다.
오전에는 다시 서범석 임흥순 이석기 권중돈 김의준 의원 등이 끌려오고 다음날에는 곽상훈 의원이 들어오구요.
나는 전부터 알고있는 헌병 상사로부터 우리들을 바다에 데리고 가 없앨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서범석 의원은 나를 보고 『총으로 한바탕하고 안되면 죽어 버리자』는 말을 합디다. 그러나 이종찬 장군 등이 반대해 우리들이 무사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3, 4회 형식적인 재판을 받다가 발췌개헌안이 통과된 후 혐의 없이 나왔지요.>

< "나라 망신시킨다" 호통 치기도>
▲곽상훈씨 (1, 2, 3, 4, 5대 의원)<군재가 몇 번 열렸는데 공개를 안 합디다. 공산당으로 몬 것이 허위라는 게 재판에서 그만 탄로 났어요. 우리를 잡아넣을 각본을 꾸밀 때 그전 좌익사상으로 구속돼있던 자를 밖으로 데려 나와 각본이 사실이라고 도장만 찍으면 외국 유학도 시켜주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도장 찍고 허위조서에 서명하고 보니 약속을 안지켜 법정에서 모든 것을 실토합디다. 나는 책상을 치면서 『이놈들아 이게 무슨 나라망신이냐』고 소리쳤어요.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던 날 원용덕 장군이 나를 보자고 하더니 『국회의원 누구누구 잡아넣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위에서 시켜놓고 지금 와서는 나에게만 뒤집어씌우니 장 모씨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흥분합디다.>
◇주요일지 (1952년 2월 17· 18· 19·20일)
※2월 17일 ▲적 「제트」기 4대 격추 ▲미 24사단 일본으로 귀환
※2월 18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서 폭동 ▲의사당 앞서 정부의 개헌안 부결 규탄 「데모」
※2월 19일 ▲휴전회담, 의제 제5항에 합의도달 ▲한일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 양유찬 박사 동경 착▲영·애, 「수에즈」문제로 협상개시
※2월 20일 ▲B29, 적 목표 야간폭격 ▲중공,「티베트」완전지배 ▲「뉴요크·타임스」,한국군 대폭 증강 계획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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