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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혈하…쾅트리 공방|ABC한국기자의 생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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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이공=신상갑 특파원】월남전의 초점은 이제 3개월 넘어 월맹군이 정령하고 있는 북부「쾅트리」성 탈환작전에 쏠리고 있다. 여섯 번이나 월남군은 이 실지를 회복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 그때마다 실패를 맛보았으며 현재 일곱 번째 공격이 진행중이다. 이 작전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21일 「후에」를 떠나 전선 최전방에 나갔던 미국 ABC방송 소속의 싱가포르 카메라맨 「샘·카이·파이」와 「테리·쿠」그리고 월남기자 「트란·반·기아」는 월맹군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서 사망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인으로서 역시 ABC에 소속해있던 사진기가 이태흥씨(39)도 함께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십자포화를 뚫고 후방으로 생환했다. 다음은 이씨가 본사「사이공」특파원 신상갑 기자에게 전한 그의 생환기이다.
월맹군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쾅트리」성 「미찬」강 서쪽 2㎞지점에서 우리 일행은「비스·뉴스」의 한국인 사진기자 이요섭씨의 지프를 빌려 타고 도착했다.
그곳에는 월남군 전차대대가 월맹군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다. 월남군 전차대대장은 앞에 보이는 들판에는 월맹군이 없으니 가서 취재해도 좋다고 「기아」에게 말했다. 「기아」를 선두로 「샘」·「테리」·이의 순서로 앞으로 걸었다. 시계는 하오2시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베트민의 심한 기습을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기쁨 없는 가도』라고 이름지은 이 1번 공로 주변을 따라 3백m쯤 전진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월맹군 AK소총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양쪽에서 공격하는 월남군에 밀려 「쾅트리」시로 향하는 1번 국도 쪽으로 쫓기던 월맹군이 도로 옆에 산재한 「벙커」속에서 우리 일행을 보고 월남군인 인줄 알고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은폐물도 없는 들판에서 우리 네 사람은 좋은 표적이 됐다. 군복에다 철모를 썼으니 월맹군에겐 틀림없이 월남군으로 비친 것이다.
나의 바로 눈앞에서 『아이구!』 소리를 지르며 「기아」가 퍽 쓰러졌다. 두 번째로「샘」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엎드렸다. 「테리」를 보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이었다. 「테리」가 따라올 것으로 보고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바로 3m거리 앞에 나지막한 둔덕이 있었다. 이 자리는 전에 미군 포진지였나 보다. 엉금엉금 기어서 둔덕을 넘으니 가느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이 나무를 방패로 해서 약 10분간 머리를 땅에 대고 기고 있으려니 계속 적탄이 퍽퍽 주위 흙 속에 박혔다.
월맹군 B-40 「로키트」도 싱싱 거리며 날아와 나의 목숨을 노렸다. 방탄조끼의 팔 한쪽을 벗어 머리를 보호했다. 철모는 어느 사이 없어졌다. 월맹군의 총소리를 들은 월남군이 이번에는 월맹군을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나는 월남군과 월명군의 십자포화사이에 끼여든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어 나오니 멀찌감치 월남군이 보였다. 월남군도 나를 보고 M-16 소총을 갈겨댔다. 나는 한쪽 손을 들고『바오치 바오치』(월남어로 보지 즉 기자라는 뜻)라고 힘껏 소리쳤다. 그제야 월남군은 내가 기자임을 알고 옆으로 돌아가라고 신호했다.
신호에 따라 1번 공로 쪽으로 기었다. 눈앞에 텅빈 「벙커」가 여러 개 나타났다. 한 「벙커」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15분 가량 혼자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양쪽에서 갈겨대는 총소리는 더욱 치열했다. 차례로 네 번째 「벙커」속으로 기어들었다. 1번 공로가 코앞에 다가왔다. 큰길로 향해 힘껏 뛰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때가 이날 하오3시30분이었다. 사지에서의 1시간10분이 약 10년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월남군 탱크 2대가 구경 70㎜포로 월맹군에 맹격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기아」와 「샘」의 죽음을 1∼2m 뒤에서 목격했으나 「테리」는 아마 양군의 십자포화에서 죽은 것으로 믿어졌다.
나는 손수 지프를 몰아 「후에」로 와서 ABC기자 「진·베네트」를 데리고 다시 현장에 갔다. 양군의 포격으로 불바다가 된 들판은 연기가 가득 차 있어 시체에 접근할 수 없었다.
7월21일 하오6시20분 ABC의 사이공 사무소가 있는 「카라벨·호텔」에 도착했다. 어떻게 알았던지 「호텔」정문에는 「호텔」사장을 비롯 ABC직원, CBS직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포옹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나를 환영해주었다.
사이공의 안전한 분위기 속에 젖어들자 나는 시가 약1만5천 달러가 드는 카메라 장비와 그 속에 든 현장사진 필름을 북새통에 잃어버린 것이 아쉽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가 생환한 것은 한국사람으로서의 악착같은 의지와 죽어도 도로까지 와서 죽어야 시체라도 찾아질 것이 아니냐는 비장함과 목에 걸고 다닌 2개의 부처상의 가호 때문으로 믿는다.
7월 22일 현재까지 동료들의 시체는 회수하지 못했다.(68년에 ABC에 입사한 이씨는 71년 홍콩지국으로 전근 가기까지 약 4년 반을 월남에서 일했는데 다섯 차례나 부상을 했다. 71년 말 파키스탄 전쟁을 취재하다가 뱅글라데쉬 게릴라에 잡혀 4일 동안 감금되어 고역을 치른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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