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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사계 여록(141)|김갑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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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재 발굴에 고심>
이 박사의 이름을 내가 처음들은 것은 1944년12월께인가 한다. 일본의 정색이 짙어가던 때였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장차 한국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단파를 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들키는 날이면 사형을 받아야 하는 때였다. 그래도 단파를 듣는 사람이 있었고 단파 소식이 흘러서 내 귀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때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몹시 신비스러운 마음으로 들었다.
이 박사가 귀국한 후 그 첫 방송을 들었다. 칠순이 넘는 노인이라는데 퍽 정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런 노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의아해 했다. 영국식 억양의 방송을 인상깊게 들었다.
정부가 수립된 후 나는 법무부에서 일을 보았다. 초대 법무장관은 이인씨였다. 제대로 부서가 짜 인지 한 주일도 못 된다고 기억되는데 이 장관이 불러서 갔더니 미군정 때 처리된 귀속 재산에 관한 처분을 재심사하는 법률을 기안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특명이니까 빠른 시일 안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박사와 「하지」사령관의 불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러나 군정 때의 귀속 재산 처리가 부당했다해서 재처리를 지시한 것은 반드시 「하지」와의 불화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본다.
이 박사는 「하지」가 유능한 군인인지는 몰라도 행정, 더욱이 남의 나라에 대한 잠정적인 통치에선 미흡한 점이 많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 첫 정사가 이것이었다
미군정 때 귀속 재산에 협잡이 많았으니까 전부 다시 조사 처리하라는 특명이었다.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 첫 시련은 반민법의 시행으로 시작되었다. 『뭉치면 산다』 는 이 박사의 신조로 볼 때 반민법은 그렇게 달가운 법률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반민법을 적용, 경찰 간부를 대량 검거하자 치안의 마비마저 염려케 했다.
내무부에서는 법무장관에게 마포 교도소에 수감중인 경찰 간부의 석방을 요구해 왔다. 반민 특위의 영장으로 구속된 피의자를 무조건 석방하라는 것이다. 법무부로서는 난제를 떠 안은 셈이다. 물론 거행했으나 이번에는 석방하지 않으면 실력으로 탈환하겠다고 나왔다.
간부들의 의사만으로써 이와 같이 엄청난 제의는 못 했을 것이고 아마 그것은 이 박사의 의사가 아니었을까고 생각됐다.
가등청정이 왜란 때 호랑이를 다 잡아가서 지금 한국에서 호랑이가 없다고 일본 수상을 꼬집어 줄만큼 일본을 싫어하는 이 박사가 반민자를 처벌하자는데 반기를 든다는 것은 명분도 없는 일이요, 감정과도 거리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뭉쳐야 산다는 신조에다 반공이라는 당장의 필요가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항간에서는 이 박사를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했다.
반공 포로의 석방 같은 배짱 있는 영단이 한·미 방위 조약, 군원 등 교섭에 한국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했던 것 등 외교에선 능란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항설대로 인사엔 등신이었을까.
내가 본 것으론 인재를 구하려고 노력한 것만은 분명하다. 중앙청 앞에 인사 추첨함을 놓아두고 인재를 추천하라고 국민에게 호소한 것은 동화적인 일이기는 하나 노박사의 인재를 구해보겠다는 집념의 일단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내무부 인사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법무부 인정에는 별로 간섭이 없었다. 법무부 요원은 일종의 기술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총장의 임명은 이 박사와의 합의가 필요했지만 그 외의 인사는 장관이 추천하면 그대로 발령되곤 했다.
그러나 정부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자 그것도 아니었다. 검찰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박사는 김익진 총장을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이우익 장관이 신분 보장 문제로서 난색을 보이자 고등 검찰청 검사장으로 발령해 버리기도 했다.
대체로 인사권자의 통폐는 독단 전행을 좋아하는데 있다. 이 박사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심복을 장관으로 임명했으면 그 아래 인사는 장관에게 맡겨야할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장관의 체통, 지압 계통의 문란, 제대로 일이 될 리가 없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런 일에는 아랑곳이 없었다.
백성욱 박사가 내무부장관으로 있을 때 이모씨를 전남 지사로 내정하고 이 박사의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잡음이 들어갔는지 취소 지시가 왔고 전남 시장·군수 전부를 서울로 불러 올리라는 명령이었다.
시장·군수는 물론 장관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경무대에 들어간 시장·군수들은 전남 지사를 투표에 의해서 선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이것도 이 박사의 인재를 발굴하려는 고충의 일단이기는 하겠지만, 등신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기도 했다.
이인씨가 법무부장관을 그만 둔 것은 임영신 상공장관의 보직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지만 기소 단계에 있어서는 논란이 많았다.
이 장관은 덮어두자는 의견이었으나 권승렬 총장은 기소 의견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장관과 총장은 월여를 뇌심했다. 권 총장은 부장 검사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협의했는데 협의 결과는 기소해야 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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