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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어록(140)|손원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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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의 군원 삭감>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군 원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55년에 나는 다시 미국에 갔다.
미국에 가니까 마침 의회에서 원조법안을 심의하고있는데 삭감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윌슨」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합의된 원조전액을 꼭 실현시켜줄 것을 몇 차례나 당부했고,「윌슨」장관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이 제공하기로 약속한 7억불의 원조에 대해 못을 박아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귀국하자마자 비행장에서『군 원 감축은 없을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선언했다.
그러나 귀국 후 얼마 안 있다가 6천만 불이 의회에서 삭감되었다는 통고가 오고 말았다. 미국에 다녀온 보람이 없게 됐을 뿐 아니라 기자들에 대한 공언이 어긋났으므로 나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대통령에게 사표를 냈다. 이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원조의 감축은 미 의회가 할 일 인데 손 장관이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인가』고 만류했다.
『아무리 약소국일지라도 약속을 어기고 주는 대로 받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외국에 대해 우리의 결심을 보여주는 뜻에서라도 사표를 수리해주십시오.』내가 사표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더니, 이 박사는『그러면 사표는 보관하고 있겠는데 여러 장관들도 이런 정신은 본받을만하오』라고 훈시를 곁들였다.
이튿날「렘니처」「유엔」군사령관이 찾아와서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이라고 대답하고『합의한지 불과 1년도 안되어 약속을 어기다니 그것이 무슨 장난이냐』고 항의했다.
나의 태도가 완강한 것을 본「렘니처」장군은『1주일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나갔는데 5일만에 그는 본국정부에서 삭감부분을 부활시키기로 했다고 알려왔다.「렘니처」장군의 덕택으로 내 사표가 반려된 것은 물론이다.
그 후 나는 56년 5월까지 장관직을 맡았는데 재직한 동안 현충일이 제정되었고, 이른바 불온문서 사건, 김성주 사건, 원면사건이 일어났다.
현충일이 제정되고 국립묘지(당시는 국군묘지)가 설치된 데는 이박사의 각별한 관심과 숨은 노력이 있었다.
55년 초 나는 이대통령에게 미국의「알링턴」묘지와 같은 무명용사를 위한 국군묘지를 만들도록 건의했다.
그때까지는 매년 한차례씩 서울운동장 같은데서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었다.
이 박사는 즉석에서「좋은 안」이라고 받아 주었으나 유가족들을 설득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유가족 대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면 각도에 따로 묘지를 만들어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했다. 이 박사의 지시에 따라 나는 이들에게 몇 해 전에 보고 온「알링턴」묘지를 설명하면서 『매년 행사를 갖고 대통령이하 정부대표자들이 헌화할텐데 도마다 묘지를 만들면 어떻게 행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설득했다.
이때 마침 이 대통령은 6월6일을 현충일로 정해서 공휴일로 만들겠다고 까지 해서 유가족들은 결국 서울에 종합묘지를 만든 다는데 양해했다.
그 후에는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난제였다. 이 박사는 친히 여러 날에 걸쳐「헬리콥터」, 혹은 자동차 편으로 서울근교를 돌아봤다.
이 박사가 풍수 지리를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강 물을 바로 굽어보는 곳이 좋겠다하여 낙착된 곳이 지금의 동작동 묘지 부지였다.
부지가 결정되고 현충일 까진 약3개월의 여유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육군공병을 동원하여 주야로 공사를 서둘렀으나 대리석으로 세우려던 묘비까지는 미처 만들지를 못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현충일행사를 국립묘지에서 갖게 되었는데 유가족들이 이 박사에게 『내 아들 내 놓으라』고 울부짖는 통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막 행사가 끝날 무렵 유가족들은 통곡을 터뜨리고 그 길로 이 박사한데 가서『아들 내 놓으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우리들이 달려들어 간신히 떼어 말려서 사태는 수습했지만, 외국사신들에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같은 해로 기억되는데 이 박사는 미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의 인재양성에 필요하다해서 국방대학원을 창설하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불온문서 사건과 김성주 사건은 당시 헌병사령부가 저지른 일임이 밝혀졌으므로 그만두고 이 기회에 내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던 국방부원면사건에 관해 몇 마디 할까 한다.
역사는 특정인에 의하여 오도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결코 왜곡될 수 없다.
당시 국방부가 군인 방한용의 원면을 부정 처분하여 자유당의 정치자금에 돌려 쓴 양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으나 결론을 말하면 사실과 전연 다르다.
이 사건은 당시 유지원 국회국방위원장이 나한테『원면에 부정이 있다고 하니 조사하라』는 공문을 보내어 국방부가 자체조사를 한데서 발단했다. 이 호 차관이 조사한 결과 당시 대위와 소위 두 사람이 혼인과 전근 때 2만원과 5만원을 각각 업자로부터 받은 사실은 있었으나 부정이랄 만한 것은 없었다.
그 후 이 박사의 지시에 따라 경무대서와 감찰위원회에서 조사했고 국회에서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만한 부정혐의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이 호 차관(현 주일대사)이나 5국장이던 현석주 씨가 아직 살아 있으니 무고한 이 사건의 진상이 더욱 명료해 질 때가 올 것이다. <계속>
(손원일 씨의 글은 4회로 끝내고, 다음은 대법관을 지낸 김갑수 씨의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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