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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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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아연
재호주 칼럼니스트

생업 터전인 시드니 우리 카페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의사와 마주 보고 있다. 카페의 아침 손님은 장의사 직원일 때가 많고 하루에 한 번은 영구차가 드나드는 걸 보면서 죽음을 가까이, 자연스레 느끼며 장사를 한다. 산 자의 배를 채워주는 곳과 죽은 자에게 예를 갖추는 두 비즈니스가 서로의 거울처럼 공존하며 사는 일에만 들떠 경박해지는 조(躁)증과 죽음에서 묻어나는 침울하고 습진 울(鬱)증의 양극성에 절제된 균형 감각과 저어하는 마음가짐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가게가 저 어디 화장터나 납골당 가까운 음침, 스산하고 황량한 도심 외곽, 허술한 곳 어느메에 있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겠다. 장의사와 마주하고 있다니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병원이라면 모를까 도심지나 주택가에 단독 운영되는 장의사나 장례식장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하지만 우리 카페는 시드니 시내에서 10분 거리의 이른바 ‘부촌’에 있다. 자랑하듯이 구태여 ‘부촌’을 언급한 이유는 이 나라는 장례 관련업이 동네 한복판에 들어서 있어도 거부감이나 거리낌을 전혀 안 느낄 뿐 아니라 싸전, 육간, 청과상 따위가 집 근처에 있어야 편하듯이 동네에 장의사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공포스럽고 기괴한 혐오 시설이려니 지레짐작하면 오해다.

 정숙하고 적요하고 나부죽하게 자리 잡은 그곳은 안식에의 소망을 깃들게 하고 죽음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마저 자아내기 때문이다. 빗장을 열기만 하면 장의사 출입문이 곧 천국문일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장의사뿐만이 아니다. 공동묘지가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 주택가와 시내, 교역자나 교인들의 묘로 마당을 가꾼 교회들을 곳곳에서 일상으로 마주친다. 마을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위치했던 아이들의 초등학교, 봄볕 다사로운 등하굣길을 죽은 자의 묘비명을 읽으며 소풍길처럼 함께 다녔던 기억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현대인, 특히 한국인들은 죽음을 삶 속에서 몰아낸 문화, 죽음을 망각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죽음에 외돌아 앉아 외면하기만 하면, 내게 죽음은 없다고 단말마로 외치기만 하면, 멈칫멈칫 준순(逡巡)하고 있으면 죽음은 영영 나를 비껴갈 듯이 시침을 뚝 떼고 살아간다.

 주변에서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는 일은 매우 드물고, 죽음에 대한 ‘소식’과 ‘보도’만 무성하다. 각종 건강 관련 보험, 노후 대비 상품 등을 구매하는 것으로, 젊게 가꾸고 활기찬 것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죽음이란 ‘죽어도’ 피해야만 하는 것, 나하고는 무관한 것, 영원한 남의 일, 지독하게 낯선 대상일 뿐이니 이쯤 되면 죽음을 떠올리며 공포심과 두려움이라도 든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리라. 이 세상에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간의 존재 양상 자체가 ‘죽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별이 전제된 연인들은 더욱 절절하게 서로에게 파고들고 둘만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할 수밖에 없다. 곧 닥칠 이별을 명료히 인식하고 있기에. 죽음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명료할수록 삶도 덩달아 명료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삶의 한복판에 죽음을 들여놓는다면 젊음과 물질에 대한 집착을 약간은 덜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고, 지금보다는 더 감사하며 내면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기억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간간이, 때때로, 수시로 되작거려 보는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 내가 사는 호주처럼 한국에도 마을마다 거리마다, 할 수 있다면 쇼핑센터나 백화점에도 장의사 등 ‘죽음 사업체’가 들어선다면 죽음을 더 자주 기억하게 될 테지만…아마도 힘들겠지. 

 그나마 딴 때보다는 ‘죽음 생각’이 나는 겨울의 초입, 한 해의 끝자락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것이 곧 온전하고 진지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길, 즉 ‘삶을 기억하는 길’이라고 하니.

신아연 재호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