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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속활자|한국과학사학회 공동토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과학사학회는 1일 서울대문리대에서「한국금속활자」에 대한 공동토론을 가졌다.
이 모임은 파리에서 공개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 본 『백운화상초녹신조직지심체요절』이 국내학계에 던진 파문의 여파였다.
이날 김두종박사는 먼저「한국금속활자」에 관한 속설을 통해 고마의 종자인서라고 알려진 서적 등은『고금상정례문』과『남명천화상반휘도가』, 그리고 대영박물관소장『구해공자가어』와 「파리」에서 나온 『직지심체요절』등을 설명했다.
그는『고금상정례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활자본의 중간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믿을 수 없었으며 『공자가어』는 금속활자로 불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금속활자는 주자본이 아니고 목활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에 대두되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박사는 이런 주장들은「파리」에서 나온 『직지심체요절』이 분명한 간기와 함께 주자본의 명확한 중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시 논의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또 일인학자들이 한국의 주자본을 중국의 영향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김박사는 이를 부인했다.
고려의 주자본은 조선조의 계미자로, 계미자는 또 경자자로, 경자자는 갑인자로 발전했으며, 이같은 시대적 변천에 따른 독자적 발전은 중국에서의 수입 흔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손보기교수(연세대)는 문화사적 측면에서 이에 맞서『한국의 금속활자는 독창적인 것이기 보다 중국문화권에 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1234년 『상정례문』이 처음이 아니고 「해동통반」이나 신라범종에 나타난 미려한 문양은 주자기술이 훨씬 상대로 소급될 수 있음을 입증하며, 특히『고최사절요』에 나타난 「금시제극지법」이란 기록은 1102년 당시에 벌써 주자된 사실을 밝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지 문화 중연으르 고려금속활자는 한문을 인쇄한 것이고, 또 발효 3백부정도에 그쳐 지식의 보급에 기여하지 못했던 점으로 봐서 의의가 있는 것이 못된다는 것.
역지학적 측이에서 천혜조교수(성균관대)는 유일한 현존 고시적자목인『직지심감망포』 의 「마이크로필름」을 검토한 결과 ①갑곽의 사주가 고착되었고 매행의 자수가 일정치 않으며 ②각행렬은 비뚤 비뚤하고 어떤 글자는 비스듬히 직자돼 있고 판이의 농도가 심해 주자본임을 의심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기술사적 측면에서 김상영교수 (성신녀사대)는 한국금속활자가 주로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선명한 자체와 적당한 경농도를 같게 하기 위해 각기 다른 비율의 동정이 만들어졌음을 들었다.
BC10세기까지 거슐러 올라가는 한국의 청동기는 성분면에서 조선조의 주자와 일치한다는 것. 청동기시대의 세문동종이나 고려의 선림사종이나 조선의 을해자나 시금의 비례는 다를지언정 성분자체는 거의 비슷한 동·석·아연·철·연 등으로 만들어 졌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체로 동 80%, 주석·납·아연 20%로 된 청동합금이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서구과학계의 견해에 관해 송감용씨 (서울대문리대강사)는 서구에 알려진 상황을 설명했다.「모리스·쿠랑」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의 금속활자는「카터」의『중국에서의 인쇄술 발명과 서구에의 전반』, 「서튼」의 『과학사 안내』, 「니덤」의『중국의 과학과 문명』등에 의해 대체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있다는 것. 니덤은 한국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 보다 1세기 앞선 1240년에 발명돼 139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썼던 것.
그러나 한국금속활자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학사학계가 서구어 논문 등을 통한 설득 노력이 요청되며 세계의 금속활자 비교연구로 우리 것의 참된 가치를 찾아야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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