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기록(112) 최재유|장관임면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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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박사의 장관임면은 갑작스레 발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사전에 내용을 알기란 퍽 어려웠다.
그런데 발령내용을 본인들에게 통고할 때 퍽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새로 장관에 임명되는 사람은 자택이나 통고가 갈만한 곳에서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고 통고를 대기하고 있었다. 반면에 물러나게 된 사람은 장관실을 비운 채 연락이 불가능했다.
아마 신임장관에겐 경무대비서실에서 누군가가 연락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일부에서는 「프란체스카」여사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있으나 내가 알기로는 사실과 다르다.
이박사 옆에서 항상 비서같이 보살피는 「프란체스카의 역할을 두고 하는 얘기인지는 모르나 이박사는 장관임면에 관해선 부인의 얘기를 거의 안 듣는 것 같았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언제나 이박사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공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물론 장관임면에 있어 어떤 사람은 말썽이 들리더라는 정도로는 얘기할 수 있는 입장이었겠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누구를 장관에 앉혀야 한다고 긍정적인 쪽으로 작용을 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박사는 장관을 포함하여 새로 사람을 쓸 때는 꼭 경무대경찰서에 신원조사를 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현직 장관을 다른 자리로 바꿀 때도 그랬다.
한번은 어떤 장관을 고시위원으로 임명하도록 국무원사무처에서 서류를 꾸며 올렸다. 그때 이박사는 그 사람의 장관취임 이후의 행적을 모두 조사 보고하도록 했었다는 것이다.
이박사는 평소 조그만 수첩에 사람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아마 정부수립 초기 국내 사정에 어두웠고 사람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메모」해 둘 필요성에서 이런 습관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동안 이 박사는 경무대비서들과 마찬가지로 장관을 임명할 때 임명장을 주지 않았다.
52년 나를 보건부장관에 임명할 때도『앞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나라일을 잘 처리해서 나를 도와주어야겠어』 라고만 말할 뿐 임명장을 따로 주지 않았다.
이박사는 56년이 되어서야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나 자신도 57년 문교장관을 맡게됐을 때 처음 임명장을 받았다.
이박사는 장관을 임명할 때 우선 구두로 하고 나중에 국무위원들이 모두 열석한 가운데서 임명장을 주었다. 장관들은 그만두고 싶어도 이박사가 그만두라고 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사표 제출할 수가 없었다.
이박사는 장관이 사표를 내면 『걸핏하면 사표를 내는 버릇은 일본식의 나쁜 습관이야』하면서 꼭 국무회의에서 반환했다.
60년 1월 서울역 압사사건이 나서 당시 교통장관이던 김일환씨가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었다.
그때도 이박사는 사표내는 것은 일본식의 나쁜 버릇이라면서 『일이 어렵고 잘못됐을수록 더 책임감을 느끼고 보상할만한 일을 해야지』라고 했다. 이박사는 사표를 되돌려 주면서 『장관이 일을 잘못해 놓고 사표만 내서 될 것 같으면 누가 장관노릇 못하겠느냐』고 오히려 나무랐다.
이박사는 장관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박사의 경륜에 미칠만한 장관도 드물었지만 이 박사와 장관들의 나이 차가 많아 장관이 그의 주장이나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기가 어려웠던 분위기도 작용했던 것 같다. 어떻든 이 때문에 경무대서 열리는 국무회의에선 대통령의 지시가 대부분이었고 이런 지시만을 받은 뒤 중앙청에 돌아와 국무회의를 속개해서 의안을 토의하고 그 결과를 이 박사에 보고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박사는 장관들에 대해 개성과 인격은 충분히 존중했다. 장관이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을 쓰겠다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한 일은 거의 없었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일이 한번 있었다.
58년 내가 문교장관을 할 때 모 국립대학의 총장임명문제가 생겼다.
당시 교육법에는 대학자체에서 총장후보를 선출하면 대통령은 문교장관의 제청에 따라 이를 임명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선출한 총장후보는 평소 자유당정부에 대해 퍽 비판적인 사람이었고 한때는 정국과 관련하여 이 박사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던 분이다.
내가 서류를 만들어 경무대에 가지고 올라갔더니 이 박사는 설명을 듣고 나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육은 국가 백년지대계야. 그 사람이 나와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을 책임지고 가르칠만한 교육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면 임명해야지』하면서 「사인」을 해주었다.
이박사는 또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특히『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냐』고 다짐하듯 물었다. 교육정책에 있어 이 박사는 반공과 대일 경계를 무척 강조했다. 교육에 대한 이박사의 이런 태도는 상당기간이 지난 오늘에와서 그 효과가 잘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장관들은 이 박사를 퍽 어려워했기 때문에 결재서류를 올렸다가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예외가 있었다.
국방장관을 했던 김정렬씨는 대통령이 안 된다고 해도 2층 집무실이나 침실까지도 쫓아 올라가서 이박사의 승인을 받아내곤 했다.
이 박사는 장관들이 내놓은 결재서류를 보통 국무회의가 끝나면 「사인」해주는 것이 상례였다. 【최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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