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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의 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아침마다 북악「터널」을 통과하여 세검정을 거쳐 홍익대학으로 나가는 길에 홍지동의 춘원이 살던 집을 바라다본다.
상명여사대 아래에 있는 이 집은 많은 인가에 둘러싸여 있어 언뜻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내가 대학시절 이 집을 자주 드나들 때에는 이 근처에 별로 집이 없었다.
이 집은 기와집 두 채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안채고 하나는 서재로서 춘원이 조석으로 북한산을 바라다보면서 사삭을 하고 집필을 하던 곳이다. 몇 해전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그 집이 많이 퇴락 된 것을 보고 어느 신문에 그 보존의 필요성을 말한 일이 있었는데 호된 반박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춘원이 말년에 훼절하여 민족정기를 더럽히기는 하였지만 그가 우리 나라 신문학에 끼친 공적이 크므로 영국사람들이 「셰익스피어」를 아끼고 독일사람들이 「괴테」를 아끼듯이 우리 민족도 그를 아껴야 하며 그런 뜻에서 그가 살던 집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반대하는 사람은 그는 악질적인 친일을 한 사람으로서 그 죄과가 이원용이 보다도 더 큰 사람인데 그가 살던 집이 있다면 마땅히 허물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춘원의 집은 헐리어 버리고 지금은 대문 앞에 있는 커다란 향나무만이 남아있다. 춘원도 가고 그의 집마저 헐린 것을 보니 새삼스럽게 인생의 무상이 느껴진다.
춘원의 민족적 양심과 문학적 업적과 변질적 태도에 대한 평가는 이제까지도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많이 할 것이다. 위대한 민족적 선각자가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춘원의 인간적인 약점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한민족의 운명적인 비애가 느껴진다. 늘 강대국 틈에 끼어서 시달림을 받는 약소민족의 서글픔 속에서 우리는 언제 헤어날 수 있을 것인가?
춘원의 집은 효자동에도 있었다. 진명여고 앞에 있던 커다란 한식가옥은 춘원의 부인 허영숙 여사의 산부인과병원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언제 찾아가 보아도 춘원은 단정한 자세로 책상 위에는 법화경과 큰 염주가 놓여져 있었다.
해방후에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춘원을 뵈 온 것은 이 효자동 댁에서였는데 그때 나는 춘원에게 참회록을 쓰기를 권한 일이 있다. 그러나 효자동 춘원의 집도 자유당시절에 헐려서 그 자리에 커다란 양옥이 들어앉았다.
춘원의 집은 명륜동에도 있다. 영문학자인 유진 교수가 춘원이 살던 집이라 해서 잘 관리하여 살고 있었는데 집도 크고 정원도 넓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춘원이 살던 집은 이 밖에도 여러 군데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모두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항녕(홍대총장·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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