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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물도 저작권 인정을” vs “보호할 가치 있어야 해당”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강일구

지난달 초 서울남부지검에 미묘한 고소 사건이 접수됐다. 일본의 지적재산진흥협회(IPPA)라는 단체가 서울 구로구의 한 웹하드(회원들이 영상물이나 음악을 소개하고 내려받을 수 있는 유료 사이트) 업체를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이 단체는 다른 업체와 네티즌을 상대로 인천지검에도 고소를 했다. 문제는 이 단체가 일본 성인물(AV·Adult Video) 제작업체들의 모임이라는 점. 한국에서 불법인 음란물의 저작권자가, 역시 불법으로 저작물을 배포한 이를 상대로 법의 판단을 구한 것이다. 한 저작권법 전문 변호사는 “2009년 미국과 일본의 성인물 제작사들이 국내 네티즌 약 1만 명을 고소한 사건이 재연된 것 같다. 앞으로도 외국 업체들의 비슷한 시도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日 성인물 업계 “年 수백억 엔 손해”
IPPA는 2011년 5월 설립된 비영리단체(NPO)다. 콘텐트·소프트 협동조합, 비주얼소프트·콘텐트산업협동조합 등 5개 단체로 이뤄졌다. 240여 개 회원사는 모두 성인비디오(AV) 제작·유통 업체다. 이들이 저작권을 주장하는 AV영상물의 90% 이상은 국내에서 음란물로 분류된다.

 지난해 6월 20일 일본에서 불법 다운로더의 형사 처벌을 가능케 한 저작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같은 날 도쿄 분쿄(文京)구의 한 호텔에서는 IPPA의 간담회 행사가 열렸다. 일본 인터넷 언론 ‘일간 사이조(cyzo)’는 이날 간담회를 보도하면서 “불법 복제와 다운로드 때문에 연간 수백억 엔의 피해를 보고 있다. 협회를 중심으로 적극 대응해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AV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전했다.

 IPPA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단체는 이후 의욕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내부뿐 아니라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지난해 대만에서는 현지 사법기관의 힘을 빌려 일본 AV물 불법 복제업체 몇 곳을 단속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네바다주에 있는 업체를 고소해 미국에서 재판을 시작했다. 이들이 한국에 눈을 돌린 걸 일회성 해프닝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IPPA는 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을 우려한 듯 입장 표명을 꺼렸다. IPPA의 국내 저작권 업무를 대행하는 회사도, 국내 법률 자문을 맡은 법무법인도 공식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수사 중이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검찰이 기소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면 그 뒤에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불법과 불법’ 중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현행법상 음란물 제조·유포는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불법 음란물이라도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데는 문제가 없다. 저작권 전문가인 임상혁(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저작권법의 취지는 아무리 수준이 낮더라도 창작성이 인정된다면 저작권이 있다는 것이다. 음란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이는 여러 판례에서 확인됐고 현재 국내 법학자의 다수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1990년 판결은 “저작물이라 함은 사상 또는 감정을 창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문학·학술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면 되고 윤리성 여하는 문제되지 아니하므로 설사 그 내용 중 부도덕하거나 위법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저작권법상 저작물로 보호된다”고 밝혔다. 이 판례는 이후 관련 사건 판단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반론도 많다. 저작권 전문가인 남희섭 오픈넷 이사는 “일본 AV업체들의 영상물은 성인물 범주를 벗어난 ‘하드코어 포르노물’이 대부분이다. 저작권법의 근본 취지는 보호할 만한 것을 보호하자는 것 아닌가. 과연 일본 AV업체들의 음란물이 그럴 만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문제도 있다. 해외 제작 음란물에 저작권이 인정되면 음란물의 절대 다수를 제작·배포하는 미국·일본의 성인물 제작업체들이 국내 업계와 네티즌을 상대로 각종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그 이익이 고스란히 외국 업체로 넘어가는 것을 국가가 보호하는 모양새가 된다. 2009년 검찰이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저작권 위반 수사를 할 때도 이를 고민했다. 자칫 수사가 또 다른 불법인 음란물 산업을 보호하는 결과가 될 수 있어서다. 검찰은 결국 저작권법이 아닌 음란물 유포 혐의만 적용해야 했다.
 
음란물 저작권 인정 땐 줄소송 우려
하지만 일본 업계는 2009년과 달리 다수의 네티즌이 아니라 불법 저작물의 업로드를 방치한 웹하드 업체들을 고소 대상으로 삼았다. 과거와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또 판례상 저작권이 인정되는 음란물에 대해 불법적인 유통·소비를 계속 방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저작권 관련 사건을 많이 맡아 온 한 변호사는 “2009년 사건 배경에는 미·일 콘텐트 업계가 있다는 의혹이 있었다. 미·일에서 성인용 음란물이 콘텐트 산업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시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음란물 문제에는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음란물이 널리 퍼져 있지만 모두 불법으로 규정돼 있어 유통·소비 과정의 적절한 규제에 대한 논의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단속을 위해서라도 음란물의 허용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윤대현(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모든 논의가 양극화되는 게 특징인데 음란물 문제도 ‘절대 안 된다’와 ‘확 풀자’는 극단적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공권력을 통한 사회적 통제를 어느 선에서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경찰 관계자도 “경찰은 상반된 압력을 동시에 받는다. 한편에서는 성인 음란물까지 일일이 단속해 범죄자를 양산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한다. 다른 쪽에서는 음란물과 거리가 먼 청소년 유해물 수준의 콘텐트 임에도 이를 단속하지 않고 뭐하느냐고 비판한다”고 말했다.

 건국대 로스쿨 한상희 교수는 “권위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개인의 쾌락과 자유를 통제하려 했고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쓰레기통에 덮개를 씌운다고 쓰레기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는 말이 있다. 문화·예술계와 수사기관, 인권단체 전문가가 참여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 성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 탁틴내일의 이현숙 대표는 “기술 변화나 단속의 어려움 때문에 음란물 규제를 푸는 것은 반대한다”면서도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성인물과 절대 안 되는 아동 음란물·성폭력물을 한데 묶어 ‘야동’이라며 가볍게 대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긴다. 이걸 명확히 구분하는 논의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franc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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