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윤석오(455)|<제26화>경무대 사계(8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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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무대 출입>
평소 경무대를 자주 드나들었던 나는 분위기가 차츰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정부수립 때부터 환도한 이후에도 줄곧 비서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 박사를 위해 사심 없이 열심히 보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56년5월 정·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일반사회에서는 경무대에 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말들이 많이 퍼졌다. 이박사가 주위의 몇몇 사람들만 가까이하여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른다느니 측근에서 이 박사를 잘 보필하지 못한다는 등 여러 가지 얘기들이 나돌았다.
제3대 정·부통령 선거전에 자유당은 이른바 민의를 내세워 이 박사의 3선 출마를 촉구했다. 하루는 당시 정치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종로에 있는 양지다방을 들렀더니 이 박사에 관해 몇 가지 얘기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나더러 『당신 할아버지가 3선 출마하시도록 우마차를 등원했다가 비가 오는 통에 감기가 들었다』면서 약값을 내라고까지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일반에서 이 박사를 「3신」이라고들 한다고 했다.
듣기에 좋지는 않았지만 나도 전부터 듣고있던 얘기여서 적당한 기회를 보아 직접 이 박사에게 말씀드리리라 마음먹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러는 중 이박사의 양자얘기가 나왔었다. 만송의 장남 강석군을 아들로 삼게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때 이박사의 「러닝·메이트」는 만송이었기 때문에 별별 얘기가 다 나왔다. 야당에서는 『이기붕이가 아들까지 동원하여 후계자가 되려고 한다』고 했다.
하루는 경무대로 이 박사를 찾아갔다. 비서실에서는 내가 온 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박사를 만나 항간에 나오는 얘기를 전하면서 만송을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왜 만송을 끌고 다녀 욕을 먹습니까, 만송을 멀리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일반여론이 이기붕씨는 건강도 좋지 않고 하여 부통령을 시킬 수 없다고 하니 사퇴시키십시오』라고 했다.
이 박사는 묵묵히 내 말만 듣고 계시더니 『사람은 좋은 사람인데…』하면서 말끝을 흐리곤 더 이상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이 박사의 생질인 심종철씨와 함께 찾아가 만송을 사퇴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간했으나 결국 「러닝·메이트」로 선거에 임하게됐다.
5·15선거가 진행되는 중 대구에서 개표중단사건이 터졌다. 여론은 이를 두고 올빼미개표라는 등 비난성이 높았다.
바로 경무대로 가서『국민들은 장일 박사가 당선된 것으로 알고있는데 개표중단사건을 보고 고의로 장 박사를 낙선시키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개표를 중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 이 박사에게 말씀 드렸다.
이 박사는 『그래, 알았어』 하시더니만 바로 공보실을 통해 『개표를 진행시키라』는 지시 담화를 냈다.
대구에서 개표가 중단되고 있을 때 이 박사를 만나러 경무대에 갔더니 비서실에서는 못마땅한 눈치로 못 만나게 하려했다. 그래서 비서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나는 비서들을 보고 『대통령이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서들이 정치를 하고 인의 장막을 쳐 왜 우리 할아버지를 욕 먹이는가, 이놈들 모두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못 만나게 한다고 수석비서관인 유창준씨 서랍을 빼서 책상을 부수고 전화기도 집어던지며 소란을 부렸다. 비서들은 이런 소리가 2층에 있는 이 박사의 귀에 들릴까봐 문을 닫아 잠갔다.
그랬지만 이 박사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비서실로 내려와 문 앞에서 마주쳤더니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고 물었다. 나는 복도에서 울면서 『할아버님, 대통령에 당선 확정된 것은 축하합니다만 분하고 원통합니다』면서 세상 여론을 모두 얘기했다. 『대통령이 나라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비서정치로 움직인다는 여론입니다. 할아버님더러 3신이라고들 그럽니다』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얘기를 하자 이 박사는 『이봐, 이게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창피스럽지도 않나』고 잔등을 치며 『알았으니 참아』라고 했다.
이 박사는 옆에 있던 서정학씨 등 비서들에게 『이 사람 진작 나를 만나려는데 못 만나게 하니 이런 일이 생기지 않나』고 나무랐다.
비서들이 『국무회의도 있고 외국손님도 있고 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하자 이 박사는 『만나는 건 내가 만나는 거지, 자네들이 아무개 왔다고 하면 끝나지 않나. 이 사람 언제든지 오면 나한테 연락해』라고 지시했다.
자유롭게 만날 수 있나를 시험하기 위해 다음날 또 경무대로 가보았다. 수위실에서 경관이 『본관으로 바로 가지 말고 경비실에 잠깐 들르라고 합니다』고 했다.
경비실에 갔더니 전화 받으라고 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전창준씨가 『사모님께서 어제 왜 여기 와서 국가기물을 파손했느냐고 묻더라』는 얘기였다. 나도 화가나 소리를 지르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본관에 올라갔더니 아무 제한이 없었다.
그 후는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요령껏 출입했다. 내가 가면 아무 말 없이 들어가게 했고 「프란체스카」여사나 비서들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둘이서만 만나게 되어 여론을 그때그때 말씀드릴 기회를 갖게됐다.

<편집자 주>83회부터는 필자가 김상래씨로 바뀜니다. 김상래씨는 정부수립 다음해인 49년 6월부터 「4·19」직전인 60년 2월까지 12년 간 경무대에서 총무와 경리관계 일을 맡았습니다. 우제하씨의 글은 4·19전후부터 다시 싣기로 합니다. <계속> 【우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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