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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하늘의 전쟁>(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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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10 전투비행전대>(4)
한국공군이 대편대로 북한에 출격한 것은 1952년7월11일과 8월29일에 「유엔」공군이 집중적으로 감행한 평양대폭격에 참가했을 때였다.
이 두 대폭격에는 제10전비전대의 F-51전투기 36대 전부가 전대장의 직접 지휘하에 평양에 출격하였다. 특히 8월29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감행된 적도폭격에는 한·미·영·호의 공군기들이 무려 연1천5백회나 출격했는데 이는 한국전쟁중 단일 목표에 대한 최대규모의 공습이었다.
이 무렵에는 「유엔」군 측이 공산측의 무성의로 휴전회담을 일반적으로 중단시키고 적에 압력을 넣기 위해 북한의 78개 도시를 집중적으로 폭격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7윌11일에도 연 8백50대의 한·미·영·호 공군기들이 평양과 사리원·황주 등지의 적 군사목표물을 공격했다. 이같이 한국공군이 대편대로 적도를 폭격한 것은 52년7월11일과 8월29일의 두 번이지만 소수편대로는 여러 번 평양에 출격하였다.
특히 50년10월 초 「유엔」군의 북진 당시 한·소 공군합동에 의한 김일성 별장폭격은 이채로왔고 또한 평양출격에서 우리 공군의 명「파일러트」이상수 중위가 전사하기도 했다. 다음은 평양출격 조종사들의 이야기.

<제1파의 첫 폭격임무 띠고>
▲강호윤씨(당시 제10전비전대장=중령·현 해사행정특심위장·50) <김영환·김신 대령에 이어 내가 제3대로 52년4월에 제10전비전대장이 됐어요. 7월11일의 평양폭격에는 사천에서 훈련중인 조종사까지 모두 동원해서 첫 「테이프」를 끊으며 들어갔습니다.
사전에 방송과 전단으로 비전투원의 소개를 권고했지만 포로수용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차별 폭격을 가하라는 작명이었어요. 나는 영예로운 제1파의 첫 폭격 임무를 맡고 들어가 선교리 다리 옆의 탄약창고에 일격을 가했습니다. 목표물을 때리고 진남포쪽으로 돌아오면서 보니까 평양상공에는 내후 속으로 날아온 우군기들로 꽉 차있고, 사방에서 검은 연기와 불꽃이 치솟습디다. 11일 폭격에 우리 강릉기지에서 3회 출격했는데 2회는 오춘목 소령이, 3회는 전봉희 소령이 각각 편대군장으로 나갔습니다.
8월29일의 대공습도 내가 지휘했는데 이보다 앞서 27일에 서울의 미5수군사령부에서 극비회의를 열고 작명이 시달됐습니다. 이때는 우리공군은 미해병대기 다음으로 평양에 진입했어요.>
▲박완규씨(당시 10전비전대조종사=대위·예비역공군대령·현 KAL기장·45) <내가 출격한 폭격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52년8월29일의 평양대공습입니다. 그때 평양폭격은 공산측이 휴전에 응하도록 군사적 압력을 넣기 위해 적도를 일시 마비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 같아요. 그리고 평양에는 적의 선전방송이 상당히 강력한 주파수로 나오고 있어 이를 침묵시켜야겠다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었구요. 새벽과 낮·저녁 3회에 걸쳐 5백대씩 도합 1천5백대의 「유에」공군기가 동원됐습니다.
우리 한국 공군이 맡은 목표는 대동강 옆 미림비행장 근처에 있는 옛날의 황금탕공장자리였어요. 미5공군에서 진입방향, 시간 등 상세한 지시가 옵디다. 강릉기지에서 인천상공을 지나 평양으로 들어가는데 하늘이 비행기로 덮였어요. 공격목포보다 우군기끼리 충돌할까 더 신경이 쓰이더군요. 평양상공에는 적 고사포가 콩볶듯 튀어 올라오는데 바로 눈앞에 있던 미군의 F-84「제트」기가 불을 뿜으며 떨어집디다. 우리는 수직강하해서 목표물에 투탄하고 「로키트」를 쏘아댔어요.
1차 폭격을 마치고 낮에 2차로 갔더니 연기 때문에 시가가 전혀 안 보여요. 저녁에 3차로 출격했는데 이미 평양시가 다 탄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8월29일의 출격에서 다행히도 우리는 피해가 없었지만 미군측은 꽤 많았다고 들었어요.>

<수훈세우고 전기 무사히 귀환>
▲주영복씨(당시 제10전비전대편대장=대위·현 공군참모차장=중장·45) <우리 10전비전대에서 3번 나갔는데 평양시가 온통 불바다가 돼서 목표물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상오에는 적의 대공포화가 아주 심했는데 저녁에는 잠잠해집디다.
평양대폭격 전날에 강릉기지의 정비사들이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9개 편대의 36대 모두가 출격한다고 정비사들은 꼬박 밤을 새우며 훌륭하게 정비를 해놓았어요. 그때 한대의 손실도 없었다는 것은 정비사들의 공로지요.>
▲전형일씨(당시 제10전비전대조종사=중위·현 ○○부대단장=준장·41) <이때 나에게 주어진 목표는 평양시의 괴뢰군 「탱크」학교였어요. 아침에는 적의 대공포화가 어찌나 심한지 하늘이 새까맣고 비행기가 마구 흔들립디다. 아군기는 서로 부닥칠 정도로 꼬리를 물고 있었어요. 폭격을 마치고 서해로 해서 강화도를 거쳐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더러 기체에 피격은 됐지만 전기 무사히 귀환했습디다.>
▲임순혁씨(제10전비전대조종사=중위·현 ○○부대단장=준장·47) <나는 이날 평양남쪽 중앙선 역가에 있는 옛 유산공장폭격명령을 받았어요. 4개편대로 짜인 2개편대군이 사리원을 지나 황주로 해서 적도에 접근했습니다. 동쪽에서는 함재기 수십대가 떠오고 남에서는 우리 f-51전투기가, 그리고 진남포에서는 미군「제트」기들이 들이닥쳐 평양상공을 꽉 메웠어요. 공격명령과 함께 1번 기가 수직으로 내려가면서 양쪽날개에서 흰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폭탄투하를 알았습니다.
기총소사하는 것도 보이구요. 나도 순서에 따라 투탄과 「로키트」공격을 했지요.

<60여 괴뢰고관 소사정보도>
8월29일의 대공습으로 평양시는 수주일 동안 화재가 계속 됐고, 도청건물지하실에서 60여명의 괴뢰고관이 타 죽었다는 정보도 들어오더군요.>
▲박희동씨(당시 조종사=대위·예비역준장·현 사업·50) <1950년 10월 초에 평양출신의 정비사인 전귀서상사가 우리 조종사숙소에 들러 자기가 평양의 김일성 별장 있는 곳을 안다면서 약도를 그려줄테니 한번 때리는 게 어떠냐고 해요.
모란봉 부근이라면서 자세히 설명하던군요. 마침 옆에 있던 미 고문관 「크로웰」대위가 호기심이 나는지 가서 부수자고 앞장을 서데요. 이래서 이튿날 「크로웰」대위가 1번 기를 몰고 나는「네이팜」탄과 「로키트」포를 장치한 2번 기에, 그리고 이상수·정영진 두 중위는 각각 3번, 4번 기를 타고 대구기지를 떠났습니다.
이·정 중위는 선교리의 적 고사포를 제압하기 위하여 10분쯤 먼저 들어가고 「크로웰」대위와 나도 뒤따라 들어갔어요.
기수를 앞으로 숙이면서 선교리 제방을 넘어 돌입하는데 적 고사포가 콩볶듯 튀며 빨갛게 올라옵디다. 내 앞에 가던 「크로웰」대위는 어느새 왼쪽날개에 고사포탄을 맞고 뒤집어지면서 추락했어요.
나는 즉시 싣고 간 「네이팜」탄을 좌르르 쏟아버리고 고도를 잡아 올라가 내려다보니 김일성 대학이 보이더군요, 우리보다 앞서 들어간 이·정 중위는 벌써 기수를 진남포쪽으로 돌려 내려가고 있구요.
나는 미 F-80「제트」기들이 몰려와 모란봉을 강타하는 틈을 타서 겨우 적화망을 뚫고 나왔어요. 다음날 나는 미 공군장교를 이번에는 T-6건국호에 싣고 다시 평양에 들어가 「크로웰」대위의 추락지점을 가리켜 주었어요. 10월 하순에 북진해서 그 자리에 가보니까 「크로웰」대위가 신던 비행화의 창이 떨어져 있습디다. 동행한 미군장교는 그것으로 충분히 전사증거가 된다고 가지고 가더군요.>
▲정영진씨(당시 조종사=중위·예비역중령·현 아세아항업사 상무·47) <김일성 별장을 폭격하러 평양에 들어갈 때 나는 이상수 중위와 함께 선교리의 적 고사포진지를 제압하려고 먼저 진입했는데 처음에는 조용해요. 제방에다 폭탄을 한참 투하해도 반응이 없구요. 그러나 투탄을 마치고 고도를 잡아올라 올 때부터 고사포들은 일제히 쏘아대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들은 재빨리 기수를 모란봉쪽으로 꺾어 진남포쪽으로 빠져 나왔지만, 우리 뒤에 들어오던 「크로웰」대위는 피격, 추락되고 박희동 대위는 간신히 적화망을 벗어났어요. 며칠 후에 이중위와 또 출격했는데 선교리 비행장 부근에 대공포화가 집결돼 있어 차근차근 폭탄을 던질 여유가 없어 싣고 간 폭탄을 일시에 퍼붓고 돌아왔지요.>
▲김성용씨(당시 조종사=대위·예비역대장·현 재향군인회 회장·47) <50년10월13일에 한창 북진중인 육군에서 평양시내에 괴로군이 집결해 있으니, 폭격해 달라는 의뢰가 왔어요. 이때는 백선엽 준장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간에 누가 먼저 적도를 점령하느냐를 가지고 맹렬한 선공경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헤스」중령을 편대장으로 강호윤 대위, 이상수 중위, 그리고 내가 여의도기지에서 평양으로 출격했습니다.

<이상수 중위 유해 시민이 안장>
우리는 괴뢰군 집결지를 찾아 폭격을 가하고 막 돌아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적의 대공포화가 쏟아져 올라옵디다. 나는 포화를 피하며 이탈하는데 앞에 있던 이상수 중위 비행기가 포탄을 맞으며 떨어져요. 「헤스」중령은 날개를 흔들며 공격을 중지하라고 합디다. 이날 전사한 이 중위 시체는 21일 우리국군이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내가 직접 들어가서 찾아냈어요. 어느 시민이 갸륵하게도 이 중위 유해를 잘 안장해 놓았더군요.
이 중위 손가락에는 평소에 늘 약혼자에게 주겠다면서 끼고 다니던 금반지가 그대로 끼어있습디다. 유해는 실어오고 추락지점에는 푯말을 꽂아놓았지요.>
◆주요일지(1951년 10월11, 12, 13일)
※10월11일 ▲미 해병대, 「헬」기로 1개 대대를 인제북방으로 수송 ▲한국공군, 독자출격개시 ▲소련, 북해도 주변 해상서 대연습 ▲「로지」미상원의원(공), 한국서 원자무기사용역설.
※10월12일 ▲신안주상공서 대공중전, 적기7대 격추파 ▲휴전회담 쌍방 연락장교회의 개최 ▲국무회의, 고급요정폐쇄가결 ▲「수에즈」운하지대 영군 가족 철수.
※10월13일 ▲아군 중부전선서 제한공세 ▲남원서 공비, 열차습격코 승객 1백7명 납치 ▲「이집트」, 「카이로」시에 비상사태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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