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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경제의식』의 변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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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크리스천·아카데미」는 28, 29일 「한국인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일련의 「세미나」의 세 번째로 「한국인의 경제의식」문제를 다뤘다. 이날 발표자는 「전통사회한국인의 경제의식」(김삼수 교수·숙명여대·경제학), 「실학의 경제의식」(김영호 강사·고려대·경제사), 「개항이후 경제의식의 변화」(신용하 교수·서울대상대·경제학)였다. 여기서 김삼수 교수는 고려 말·이조 초 「경제순환론」을 쓴 정도전을 한국 최초로 정치·경제학체계를 세운 사상가로 평가, 관심을 모았으며, 김영호 교수는 서구의 중상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로 연결되는 것과 한국에 있어서의 실학-개화사상의 연결을 동일한 형식으로서 파악해 설명했다. 또 신용하 교수는 갑신정변 이전에 한국에 형성된 초기개화사상은 서구의 계몽사상을 능가하는 독자적인 산업혁명이었으며 시민민주주의의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주장했다고 밝혀 한국개화사상가들의 정치·경제사상수준을 재인식시켰다. 다음은 그 내용의 요약이다.

<전통사회의 경제의식>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뛰어난 불승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다. 그러나 그가 화폐에 관해서도 상당히 깊은 식견을 갖고 있음은 새로운 발견이다. 그는 『주화를 사용하면 쌀을 화폐로 사용하는데서 오는 모리배들의 간교한 술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또 『국가가 금·은·주·옥류와 미·포만을 축적할 것이 아니라 썩고 상하고 재해를 당하기 쉬운 미·포보다 주화를 써 저축하면 편리하며 거래에도 편하다』고 주전건의를 하고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말, 이조 초의 정도전(1337∼1398)은 경제순환론의 주창자로서 한국 최초로 정치경제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이조의 건국공신이며 척불의 선봉유학자로 알려졌지만 경제사상가의 면모도 다시 평가돼야겠다.
그는 봉건국가를 두호하면서 비생산계층인 대토지소유층, 특히 불교사원들을 타도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내세웠다.
불사들의 조세농단·토지 겸병·농민수탈 등을 일소함으로써 국가경제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의 주장은 ⓛ조세의 산출과 소비를 양입위출의 원칙에 따라 하도록 했는데, 곧 생산에 따라 소비를 한다는 것이다. ②봉건사회를 질서 유지체제로서 긍정했고 ③화폐제도가 농민층을 불리하게 한다면서 이의 배제를 주장했으며 ④반반으로 나누는 차경의 불합리를 비난했다.
그는 기본세를 농상에서, 보조세를 부세·매운·염철·산장·상공 등에서 취하고 지출을 이 한도에서 억제하는 전체적이고도 순환적 파악을 하고 있다.
그의 경제론은 유학「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자연법사상에 따른 복고주의이다. 불사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국유론을 폈던 것이다.
이는 경제사상사적으로 독일 관방학파와 비교되지만 소영주주의가 아니고 국가주의적, 즉 정치·경제사상적으로 월등한 순환파악을 한 것이다.
또 「프랑솨·케네」의 경제표와 비교해서 거의 다른 점이 없다.
정도전의 이론은 세계정치경제학사에 있어서 원류가 된다고 감히 주장하진 못하지만 현재 인정되고 있는 영국이나 「이탈리아」의 정치경제학 원류보다 2세기 가량 앞서는 것이다.

<실학의 경제의식>
실학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많기 때문에 그 경제의식을 논하기는 상당히 막연하다. 그러나 이조후기에 나타난 개혁유학 사상체계라는 일반적인 실학개념을 인정하고 보면 실학에 나타난 경제사상은 서구중상주의가 산업자본주의와 연결되듯이 실학과 개화사상이 연결되는 어떤 통일적 경제의식문제를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과 인위의 갈등, 둘째는 경제와 윤리의 갈등, 세 째는 근대지향·민족지향의 상호갈등이다.
자연과 인위의 문제를 보면 실학자들은 경제현상을 자연적 질서에서 독립시켜 인위적 질서로 환원시킨다. 이것은 주자학의 이가 물리이며 도리인 미분적 파악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이의 질서에 따른 「천작」이 아니고 「인작」으로서 객관화한 다산은 경제문제를 능률위주로 생각하고 생산성을 기준으로 분배하는 경제제도를 구상했다.
인위적 사회경기질서를 강조하지만 또 그 한계로서 「사물상의 중정과 조화」를 강조, 우하영·다산 등은 경제·인구의 자율조정을 주장해 근대자연법사상에 크게 접근했다.
경제와 윤리의 관계에 관련해서 실학자들은 인욕을 긍정하고 상품화폐경제사회 속에 인간을 넣었을 때 심한 마찰을 느꼈다.
실학자 가운데서도 성호는 인욕의 제한을 내세우지만 박지원과 박제가는 「이용과 후생은 정덕에 앞선다」고 보고 윤리를 후퇴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약용은 만법귀일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인간의 개별성을 강조, 개인의 인욕을 인정하고 이윤추구를 정당화한다.
다산은 사민구직이 모두 성스럽다는 직업윤리를 내세우고 덕의 후획설을 강조, 「서」의 윤리로서 경세제민·이용후생을 이룩한다고 주장한다.
자주의식과 진보의식의 갈등에 관련해서는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반계가 자주의식을 소홀히 하면서도 경제적 진보의식을 가졌던데 비해 다른 사람들은 경제발전보다 자주를 강조한다. 또 문명을 지나치게 낙관해서 발전된 국가들은 침략하지 않는다는 낙관주의적 국제주의자도 있다.

<개항이후 경제의식의 변화>
개화사상은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직접 계승해서 성립, 발전한 것이다. 개항직전인 1860년대에 형성되어 개항 후 새로운 사태에 대응해 더욱 발전된 한국인의 새로운 의식체계다.
갑신정변이전 초기개화사상 (1876∼1884) 의 궁극목표는 국가의 자주와 부강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선진자본주의문명의 사회제도를 도입, 외세에 응전해야했다. 특히 김옥균은 「대경장개혁」을 주장했다.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근대적 상공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을 주장했다. 부국강병의 기초로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 철공업·기계공업·조선공업·철도·기선·전신 등의 개발을 내세웠다. 공업도 공장제 기계공업을 생각했다.
이들은 또 근대적 광공업개발과 함께 교통·운수·통신수단의 개발과 도로국의 설치를 주장했고 농업의 근대적 경영도 강조했다. 박영효는 실제로 목장과 농업시험장을 설치, 근대적 농장경영을 시도했다.
이 같은 것은 바로 경제의 대경장개혁을 통한 「산업혁명론」의 구상이었다.
산업혁명의 수행을 위해 자본과 기술의 공급문제를 다룰 경제제도도 구상했다. 김옥균은 주식회사와 합자회사와 같은 회사제도를 도입, 이 상공업 기업체는 정부가 강력히 보호·육성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와 회사의 「상약」제도는 당시 중국개혁론자들의 「관독상판」보다도 명백하고 발전적인 자유주의적 육성책이다.
김옥균은 정부에 대해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경성개시를 통해 민족자본의 보호·육성을 주장하고, 중앙은행 등 은행의 설치와 호조가 경제정책을 담당할 것을 내세웠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외국기술자를 초청, 연구원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는 방안과 기술학교·특허권·저작권 등도 체계적으로 구상했다.
「위로부터의 자본주의적 산업혁명」을 통해 정치개혁도 주장, 의회주의와 내각제도, 의무교육 등 민주적 자유주의 개혁의지를 밝혔다.
따라서 초기 개화사상은 그들 나름의 계몽사상·입헌군주제도·산업혁명론을 통합한 의식체계였고 외래자본주의 제국의 도전에 대한 급진적인 응전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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