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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뉴스 인 뉴스<231>김동리 탄생 100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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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하현옥 기자

올해는 한국 근대소설의 새 장을 연 김동리(1913~95)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마’와 ‘무녀도’ 등을 쓴 김동리는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와 함께 한국 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박경리(1926~2008)·이문구(1941~2003) 등 수많은 작가를 문학의 길로 이끈 한국 문학의 대부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되짚어 봅니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 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

 1996년 김동리 작고 1주기를 맞아 미당 서정주 선생이 쓴 산소의 비문이다. 김동리의 제자인 이근배 시인은 한 글에서 “대하소설로도 다 쓰지 못할 동리의 크고 넓은 생애를 이렇게 짧게 담아낼 수 있는 이는 오직 미당뿐”이라고 말했다.

# 한국 소설의 지평을 넓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소설가 김동리는 한국 문단의 큰 나무였다.

김동리의 등단은 화려했다.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되며 등단한 그는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돼 소설가란 타이틀도 거머쥔다. 이어 36년 동아일보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며 ‘신춘문예 3관왕’이란 영예를 안았다.

 그는 한국 사상의 뿌리와 토착적 삶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운명의 궁극적인 모습과 인간 정신의 극한을 천착하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특히 ‘무녀도’와 ‘황토기’ 등의 작품으로 한국의 샤머니즘을 민족문학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김동리를 일컬어 “오직 나와 세계와의 대결에 천착해 인간의 운명을 문제 삼고 있는 한국의 니체”라고 평했듯, 그는 샤머니즘과 불교·유교·기독교 등을 소재로 인간의 운명과 구원의 문제를 작품 속에 담으며 한국 문학의 정신적 지평을 확장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대립에서 생긴 정신적 갈등을 다룬 ‘무녀도’는 이후 중편 『을화』로 개작(78년)됐으며 이 작품은 82년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 10위권 내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등신불이 된 만적선사의 고뇌를 그린 ‘등신불’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짙게 나타난다. 반면 예수와 사반을 통해 영혼과 육체의 모순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파고든 장편 『사반의 십자가』는 기독교적 인식을 바탕으로 천상적 세계관과 지상적 세계관의 대립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문학평론가 장윤익씨는 “우리의 민족 정서를 기반으로 샤머니즘, 기독교, 불교, 유교를 융합해 인류의 보편성으로 승화한 동리의 문학은 인간의 운명적인 삶의 양상과 구경적인 생명의 추구를 본격문학으로 확립한다”고 평했다.

# 순수문학의 최전선에 서다

사진 위는 생전에 서예를 즐긴 김동리가 1995년 붓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 사진 아래는 1974년 학생 독자들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김동리가 문단에 발을 들인 때는 험난한 시절이었다. 일제 강압과 해방 공간에서 펼쳐진 이데올로기 논쟁 속에서도 그는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평생 순수문학에 대한 투철한 문학관을 고수했다. 37년 서정주·김달진 등과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전개할 때도 철저하게 순수문학을 표방했다.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김동리는 문학 전반에 해박했던 이론가였다. 해방 직후 김동석과 맞붙은 순수문학논쟁은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사례다. 김동석의 ‘순수의 정체-김동리론’(1947)에 대해 김동리가 ‘독조(毒爪) 문학의 본질-김동석의 생활의 정체를 구명함’으로 응수하면서 ‘문학의 기능’을 둘러싼 논쟁이 된다. 이와 관련해 김동리는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문학 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라고 밝혔다.

 순수문학의 강력한 옹호자인 그는 좌파 혹은 참여문학과의 논쟁과 대결에서도 늘 최전선에 섰다. 현민(玄民) 유진오(1906~87)와 벌인 ‘순수와 참여’ 논쟁이 그것이다. 39년 유진오가 ‘순수에의 지향’이라는 글에서 시인들의 현실 도피적 성향을 비난하자 김동리가 이에 맞서 반박문을 발표한 것. 김동리는 해방 이후 참여문학파에 대항해 반공문학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동리는 50년대 초에는 ‘우상의 파괴’라는 비평적 명제를 제기한 문학평론가 이어령과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른바 비문(非文) 논쟁(1959)과 실존주의 논쟁 등이다.

# 한국 문학의 대부가 되다

 김동리라는 큰 나무가 한국 문학에 드리운 그늘은 크고 깊다. 서라벌예대(중앙대 예대의 전신) 학장과 문예지 추천위원으로 활동한 김동리는 주요 작가들을 문학의 길로 이끌며 ‘김동리 사단’을 형성, 한국 문학의 대부로 우뚝 섰다.

 그가 추천한 대표적인 작가가 소설가 박경리다. 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한 박경리는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처음 보여준 것은 소설이 아닌 시였다. 박경리의 습작시를 본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며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이듬해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한말숙과 문순태·서영은 등도 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서라벌예대 제자군은 더 화려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관촌수필』의 이문구, 『죽음의 한 연구』의 박상륭, ‘저녁의 게임’의 오정희 등이 모두 김동리의 제자다. 이들 중 이문구와 박상륭은 스승인 김동리의 샤머니즘을 자신만의 색깔로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에서 “박상륭과 이문구의 라이벌 의식은 문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것”이라며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은 ‘샤머니즘의 세계화’(박상륭)와 ‘샤머니즘의 움막 짓기’(이문구)라는 성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74세에 서른 살 차이 서영은과 세번째 결혼

서른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뤄낸 김동리와 소설가 서영은 부부. 1987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동리는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중앙포토]

김동리의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세 번의 결혼을 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의 작품만큼이나 세간의 화제가 됐다.

 첫 번째 부인은 1939년 결혼한 진주여고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 김월계였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소설가 손소희(1917~87)를 만나면서다. 통신사 기자 등으로 일했던 손소희가 47년 서울 명동에 다방 ‘마돈나’를 열고 문인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이들의 관계를 깊게 만든 건 6·25 전쟁이었다고 한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한 김동리를 손소희가 자신의 집 안방 천장 위에 석 달 동안이나 숨겨준 것이다.

 이후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간 김동리는 손소희와 딴살림을 차리고, 이 사실이 부산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기정사실화된다. 소설가 이호철은 문단 야사를 연재한 글에서 “손소희는 이 일에 대해 ‘그 기사는 20%의 사실에 80%의 픽션이 섞여 우리의 결합을 세상에 광고한 격이 돼 운명을 수용하게 했다’고 밝혔다”고 언급했다.

 서울로 돌아온 53년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66년 김동리는 첫 번째 부인 김월계와 이혼한다. 손소희는 김동리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김동리는 온전히 손소희의 남자로 남지 않았다. 이내 서른 살 연하의 작가 지망생 서영은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서영은은 박경리의 주선으로 등단 추천을 받기 위해 서울 신당동 김동리의 자택을 방문했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손소희가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김동리 선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 것이 문단의 뒷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8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영은의 ‘먼 그대’는 그들의 연애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87년 1월 손소희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봄 김동리와 서영은은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친인척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린다. 김동리가 74세, 서영은이 44세였다. 이들의 결혼으로 세상은 한바탕 떠들썩했다. 95년 김동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8년간 공식 부부로 살았다.

김동리의 주요 작품

화랑의후예(1935) 몰락한 양반인 황진사를 주인공으로 해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양반 계층의 오만과 허위성을 폭로한다.

무녀도(1947) ‘무녀도’라는 그림의 내력을 통해 무속의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충돌, 대립을 그린 작품. 어머니인 무당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의 갈등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천착했다. 이후 중편 『을화』로 개작해 발표했다.

역마(1948)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을 타고난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모습을 통해 한국인의 전통적인 운명관을 보여준다.

사반의 십자가(1958)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반을 유대인 게릴라 집단의 지도자로 설정해 ‘하늘의 왕국’을 주장하는 예수와 ‘땅의 왕국’을 주장하는 사반의 모습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논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구원을 위한 현실 참여와 종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등신불(等身佛)(1963)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왔다 탈출한 주인공 ‘나’와 당나라 때 소신공양으로 성불한 만적선사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인간적 고뇌와 종교적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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