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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마라톤 아저씨 40년|진주의「새벽 6시」라는 김근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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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진주=곽기상 기자】뛰면서 산다. 인생은 끝없는「마라톤·레이스」인가. 오르막길을 치달리는 숨가쁜 순간, 괴로움을 인내해야 하는 과정이 마치「마라톤」의 그것과 같아서 일게다. 4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뛰면서 살아온 인생.
『「마라톤」아저씨』김근배씨(56·경남 진주시장대동125)는「마라토너」처럼 두 다리로 뛰면서 숨을 몰아쉬기도 했고 가슴이 터지도록 힘겨운 순간을 참고 견디면서 가난한 평생을 살아왔다.
진주의 새벽6시, 남 강을 굽어보는 촉 석 공원. 짙은 안개가 벚꽃향기를 싣고 산허리를 감아 돈다. 푸른색「트레이닝·유니폼」, 「베레」모에 검은색 운동화 차림의 김씨가 날렵하게 두 다리를 옮긴다. 이마에는 비지땀, 온몸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김씨 뒤에는 학생 10여명이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뒤질세라 따르고 있다. 월계관을 꿈꾸는 어린「마라토너」들은「코치」의 강행군을 이겨내고 있다. 쉰 여섯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항상 앞장서 뛰는 김씨는 고개 막바지에서 더욱「피치」를 올린다. 새벽길을 30리나 달린 이들은 이윽고 공원의 공터에서 가벼운 뜀뛰기로 숨을 고른다.
김씨의 고향은 황해도 벽 성군 금산 면 신창 리. 산을 등에 진 조그만 마을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특히 몸이 약했다. 잔병치레를 하면서 해 주 의 청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선생은 그에게 건강이 제일이라는 것과 모든 운동의 기초가 되는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아침 등교 길 20리를 빠른 걸음으로 다니다가 차차 뛰어다니게 되었고 방과후에는 마을 뒷산에 올랐다.
그 무렵 손기정 선수가「베를린·올림픽」에서「마라톤」에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 김씨는 마치 자기가 우승이나 한 것처럼 감격스러웠고 가슴 설레었다. 훌륭한 달리기 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눈비를 가리지 않고 산을 뛰어올랐으며 하루 30리 이상 뛰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몰라보게 건강해졌고 기록도 하루하루 달라졌다.
김씨가 처음으로 공식대회에 나선 것은 18세 때. 해 주에서 열린 해 주∼금산간 32km 단축「마라톤」대회에 처녀 출전했던 것. 그에게 「폼」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1등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마구 달렸을 뿐. 30여명의 선수를 물리치고 1시간43분26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김씨는 지금도 월계관을 쓰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름 없던 달리기 선수는 일약 해 주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김씨는 더욱 연습에 몰두했다.
해방이 되고 6·25사변을 만나자 김씨는 다해진 운동복만을 가지고 피란 길에 올랐다. 서울·대전·금 천을 지나면서 지게품팔이로 생계를 이으면서 진주까지 흘러들었다. 진주시상대동 시외「버스」정거장에서 풀 빵 장사를 시작하면서도 계속「마라톤」을 했다.
처음 진주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홀몸으로 피란 나와 풀 빵 장사를 하는 그가 돌지 않았으면 저럴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뛴다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된 그는 하루도 게을리 않고 이른 새벽길을 뛰었다.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를「마라톤」선수『새벽 6시』라고 불렀다. 새벽6시면 어김없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스스로「마라톤」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 42년 동안 전국체육대회, 지방의 단축「마라톤」대회 등「마라톤」종목이 낀 경기라면 한번도 사양 않고 출전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모두 73회. l8살 때 한번 우승했을 뿐 다른 경기에서는 상위입상도 못했지만 김씨는 남다른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출전한「레이스」에서 단 한번도 기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골·인」해도 부끄럽지 않았고 구경꾼들은 오히려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요즘 젊은 선수들 가운데 툭하면「컨디션」이 어떻다면서 중도에서 기권하는 일이 많은데 한심하단 말야. 끝까지 뛴다는 것은「마라토너」의 의무지.』도무지 투지가 모자란다는 김씨의 불평이다.
김씨는 젊은 날 대 선수가 되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운동선수가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에너지」를 온통 한가지에로만 치중해야된다는 주장이다. 김씨는 47세 때 비로소 대 선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버리고 결혼했다. 그때까지 외로운 총각생활을 하면서 운동에 전념, 기록향상을 꾀했지만 언제나 의욕만이 앞장섰다.
풀 빵을 팔아 한달 2만원 남짓한 수입으로 생계를 잇지만 김씨의「마라톤」에 대한 집념은 끊을 수 없단다. 오늘도 새벽6시 푸른「유니폼」의 김씨는 촉 석 공원 가파른 언덕길을 뛰면서「마라톤」한국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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