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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제자 윤석오>|<제26화> 경무대 사계 (44)|황규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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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대전 체류 4일>
전선이 한강 방위선에서 며칠간 고정되자 그런대로 정부의 기능은 발휘되기 시작했다. 모든 행정 연락은 이영진 충남지사가 맡아 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수원에서 국군을 독려했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회의원들도 수원을 거쳐 대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2백10명의 국회의원 중 62명이 남하하지 못하고 적 치하에서 고초를 겪었다.
5월30일에 선출된 2대 국회의원들은 6월19일 개원식이 있은지 1주일만에 6·25를 당했던 것이다.
동란이 일자 국회는 26일 전 국무위원을 출석시켜 대책을 따졌으나 정부 당국조차 사태의 진상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북괴의 불법 남침을 규탄하고 「유엔」과 미국에 긴급원조를 요청하는 결의안만을 채택했다.
26일 저녁 서울의 전방 방위선인 의정부가 침공 당하자 국회는 의원들에게 연락해 27일 새벽 2시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개회 초여서 36명의 의원에게는 회의 통보조차 못했다. 통보를 받은 의원 1백74명 전원이 모인 심야 회의는 원세훈 의원이 제안한 「수도 사수에 관한 결의안」과 「사태 수습 긴급조치에 관한 대 정부 건의 안」을 결의하고 새벽 5시쯤 산회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이 대통령을 태운 3등 남행 열차가 한강 철교를 건넌 뒤였다.
정부가 서울 사수를 공언했고 국회도 사수 결의를 한만큼 의원들은 자연히 피란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이것이 많은 국회의원을 잃은 원인이 됐다.
미 육군 24사단이 부산에 상륙하기에 앞서 이 대통령은 6월30일 육군 참모 총장 채병덕 소장을 해임하고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육해공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SCAP와 의논했음은 물론이다.
대전에 있을 때의 몇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그때는 이미 서울 노량진에 있던 국제 전화 중계소가 적의 포화로 불타버렸었다.
이제 대전에서 국제 전화를 거는 길은 유성에 있는 중계소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곳을 통해 일본에 있는 주일 대표부를 거쳐야만 「워싱턴」으로 중계가 가능했다. 그야말로 생명선 같은 것이었다. 우리 정부의 전화는 대통령 임시 관저의 침실 바로 문밖에 있었다.
일본의 전신 전화국에서는 아주 친절하게 통신 업무에 협력했다. 그쪽에서는 몇 분마다 한번씩 시험 전화를 걸어 통화의 성능을 시험해 주었다. 통화는 영어를 썼는데 한번은 저쪽에서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도오모·아리가도」라고 했다.
이 말을 하고 수화기를 놓자 이 박사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박사는 눈을 부릅뜨고 『이판에 「아리가도」가 뭐야, 응. 이자가 정신이 있어, 없어』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평소 거의 욕을 안 하는 분이다. 욕을 해봐야 『고얀 놈』『포살 할 놈』이나, 애들같이 어리다고 해서 『탯 (태) 덩어리』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대전에서 신 국방장관을 보고 『탯 덩어리』라며 혀를 찬 일이 있다.
지사 관사의 문을 들어서면 화강암 계단이 있다. 어느날 오후 이 박사는 무심히 밖을 내다보다가 신 장관이 이 계단에 앉아 턱을 괴고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박사는 나에게 『저런 탯 덩어리 좀 보게나. 저걸 국방장관이라고…』하며 혀를 찼다.
6월30일 오후 4시쯤이었다. 평소 이 박사와 가깝던 「시카고·트리뷴」지의 기자가 찾아왔다. 그는 『괴뢰군 「탱크」 10대가 서빙고 쪽 한강을 돌파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대통령께 전해주었다.
이 박사는 당장 진상을 확인하라고 내게 지시했다. 나는 미 대사관 1등 서기관이던 「닥터·노블」에게 경위를 물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그 얘기 어디서 들었느냐고 따지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리고도 안심이 안되는지 이 박사를 찾아와 『사실이 아니니 안심하라』고 재삼 확인했다. 잠시나마 술렁대던 위기 의식은 사라졌다.
서빙고 쪽이 허술하긴 했지만 한강 방위선이 완전히 뚫린 것은 7월3일이었다. 그전에 잘못된 보고가 자주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이 박사가 다시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가게된 것도 결국 이러한 유언 때문이다.
7월1일 새벽 3시.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들어 곯아 떨어져 있는데 누가 나를 두드려 깨웠다. 벌떡 일어나 보니 경호 경관이었다. 주위는 발짝 소리, 자동차 소리, 수군대는 소리로 소란했다. 왜들 이러느냐고 물으니 『공산군 「탱크」가 한강을 건너 수원을 지나 남하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미 대통령 부처는 떠날 채비를 다하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이 빗속을 뚫고 목포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직접 부산 쪽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대구 지방에 「게릴라」가 나올 것 같다는 정보 때문이다. 기차를 이용하지 않은 까닭도 기차로 가면 아무래도 행로가 자유스럽지 못하니 자동차로 가면서 임시웅변의 조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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