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여야는 예산 국회 위해 휴전협정 맺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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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오는데도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사가 진행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정부의 마지막 해인 지난해 결산조차 처리되지 못한 상태다. 여야가 소모적인 정치 공방을 벌이며 국회 기능을 마비시킨 탓이다. 양쪽 모두 말로는 민생을 위한다지만 정작 민생과 직결된 법안 처리와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예산안 심사에 대해선 손을 놓고 있다.

  국회법에 따르면 결산 심의·의결은 정기국회 개회 전, 즉 8월 말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야는 스스로 만든 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헌법 54조 2항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시한이 불과 보름 뒤인 12월 2일이다.

 국민에겐 무척 난감한 일이다. 헌법을 준수해 무턱대고 빨리 예산안을 처리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부실 심사는 물론이고 선심성 예산이 끼어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늘 그래 왔듯이 시한을 무시하고 느긋하게 하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국회는 납세자의 소중한 세금을 이렇게 막 취급해도 되는 건가. ‘참 나쁜 국회’라는 비난에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예산안 처리는 여야의 대립이 격화되는 한 계속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올해 예산도 정월 초하루 새벽에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내년도 예산은 이보다도 더 늦어질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예산을 정쟁에 연계시키려는 듯한 태도다. 지난 15일 김한길 대표는 민생법안과 예산안 처리를 요청한 정홍원 총리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김 대표는 당시 정 총리에게 “민생과 경제 살리기를 위해 지난 일을 털고 가자”고 했다고 한다. 민생과 예산을 정쟁과 별도로 본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민주당이 두 사안을 연계시키는 순간 책임 있는 수권정당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팽개치는 셈이다. 물론 야당만 탓할 일이 아니다. 여당 역시 야당을 설득하지 못한 데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정부 출범 이후 첫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새누리당은 과연 집권여당다운 리더십을 발휘한 적이 있는가.

  이래저래 예산안이 제때 처리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자칫 최초로 준(準)예산을 짜야 할지도 모른다. 준예산이란 새해가 시작됐는데도 예산안이 처리되지 못한 경우 국가 기능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전년에 준해 쓰도록 한 제도다. 쉽게 말해 한국판 ‘셧다운’이다.

 초유의 사태가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는데도 여야는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듯하다. 그저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겠다는 투쟁에 매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셧다운해야 할 건 정부 기능이 아니라 여야의 정쟁이다. 정 타협점을 찾지 못하겠다면 잠시 휴전하고 결산과 예산만이라도 처리해야 한다. 싸울 시간은 그 뒤에도 많다.

  또 차제에 준예산이 편성될 경우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삭감하는 등 실질적인 제재가 가해지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예산안 처리를 밀린 숙제하듯 하는 못된 버릇을 고치도록 말이다.